만난 적 없지만, 낯설지 않은
안녕하세요.
저는 자살유가족입니다.
2009년 11월 30일 오전, 거실과 현관 사이.
몸은 그곳에 있었지만, 이미 제 곁을 떠나버린 어머니를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추위를 잘 타지 않음에도 그 날을 아주 추웠던 날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글을 쓰는 방금 전 까지도 말이지요.
지금 막 기상청 자료를 찾아봤는데,
2009년 11월 30일 인천의 기온은 최고기온 10도, 최저기온 4.2도로
겨울치고는 추운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왜 춥다고 느꼈는지,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의 체온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를 발견하고 몸을 만졌을 당시,
사람이 이렇게 찰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아주 찼기 때문입니다.
10년 넘도록 그 날은 추운 날이었는데,
이제 저의 기억은 조금 바뀔 것 같습니다.
그 날은 춥지 않으면서도 추운 날이었다고 말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유가족도 계실 거고, 지인도 계시겠지요.
사람들마다 배경도 다르고 마음 상태도 다르기에
얼마나 힘드실지 저는 100%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께 완벽히 들어맞는 조언을 해 드릴 수 없다고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 글은 단지 사별 직후 제가 어떤 과정을 거쳐 나아졌는지
그냥 저의 스토리를 담은 글입니다.
제 브런치의 글들을 읽으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부끄럽게도 제 일상은 그렇게 건강하다 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감히 말 하건데, 개인적으로는 전보다 확실히
더 괜찮고, 더 건강하고, 더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저의 방법을 스스로에게 강제하지 마시고,
진심이 가는대로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다른 분들에게도 이 글을 보여주신다면
그분들에게도 강제가 아닌,
모든 것을 진실함과 솔직함으로 하실 수 있도록 인정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저의 이야기로 작게나마 위로를 얻길 바라며.
당시 이 모든 것이 다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이 아니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엄마가 늘 그랬듯 자는 저의 엉덩이를 두들겨 깨우고는 주방에 가서 아침을 차리며 밥 먹으라고 소리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꿈에서 깨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마주했던 것은 결코 깨어날 수 없는 지독한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집안 곳곳을 기웃거렸습니다. 엄마가 집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엄마를 찾을 수 없었고, 엄마를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습니다.
저는 엄마를 마음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그 참담한 현실 때문에 얼마나 긴 시간을 후회로 보냈는지 모릅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제발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가 엄마한테 더 잘 해줘서 죽음을 막았을 거라고 생각했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상상 속에 갇혀버렸습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 잘해주지 못한 것과 내가 좀 더 잘 했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그리고 결과가 바뀌었다면 달랐을 이 현실에 대해 상상하며 공상 속에 살았습니다. 2년 정도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 2년 동안 저는 폐인이었습니다.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자살도 많이 생각했고요.
제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충격을 대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못했습니다. 제 안에 저를 가두고 아무도 그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니까요. 차라리 이별에 대한 애도를 했으면 그게 더 나았을 것입니다. 슬퍼함은 슬픔의 감정을 솔직하게 느끼는 것이고 그로 인해 슬픔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되니까요. 하지만 현실부정은, 애도도 아니고 일상을 살아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현실부정을 통해 자신을 더욱 망가뜨리는 수렁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가장 부적절한 대응방법 하나를 꼽자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이라고 단정 짓고 묻어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했던 방법처럼 말입니다. 묻어버린 문제는 기생충처럼 내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나 언젠가 삶 자체를 삼키려 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문제와 고통을 인정하고, 애통하고 아픔을 느끼면서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하지요. 저는 사실을 부정하고 거짓을 붙들다가 모순과 괴리에 잡아먹혀 매일 환청을 듣고 환영(illusion)을 보며 만신창이가 되어서야 정신과에 가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밟았습니다.
인정하는 것은 아픔이고 고통이지만, 오히려 받아들이는 것이 그렇지 않고 자신을 기만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고 건강할 수 있는 길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려 하니 정말 죽을 듯이 아팠습니다. 엄마의 인격은 내 인격이 되어 있었고, 삶의 전부라 할 수는 없더라도, 엄마가 내 삶의 기초이며 의지할 기둥이었던 것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내 어렸을 때의 모든 추억, 내가 있게 한 장본인이었던 사람이 떠났음을 인정하는 것이 너무나도 슬펐습니다. 엄마가 없다는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저의 무의식은 엄마에 대한 즐거운 추억들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 저를 압도하는 우울함과 떨림으로 ‘이런 존재를 떠나보낼 수 있겠어?’하고 제게 묻는 것 같았습니다.
그 물음에 응답하는 것, 물음 자체를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던지. 저는 오열하고 또 오열했습니다. 어딜 가든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고, 길에서 엄마 또래의 아주머니를 보면 곧장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때 저는 눈물을 달고 살았습니다. 아픔에서 피하지 않으려 하다 보니 아픔이 더 강하게 다가왔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길에서 갑자기 울음이 터져버려 엉엉 울며 거리를 배회한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파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상담을 거치며 그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파하지 않으면 내가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되고, 나를 속이고 내 감정을 속이면 나는 미쳐버릴 것이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슬픔의 감정이 집채만 한 파도처럼 몰려올 때면 저는 그 파도만큼 슬퍼하기 위해 노력했고, 잔잔한 그리움이 밀려올 때면 애정 어린 슬픔을 인정하고 타일러줬습니다. 예전처럼 슬픔을 떨치기 위해 게임이나 운동을 붙잡지 않고,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결국 파도는 점점 잠잠해졌습니다. 떠나보낼 때의 아픔은 씻겨나갔고, 지금은 그 자리를 보드라운 추억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엄마를 발견했을 때의 충격이 컸던 나머지, 저는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경기를 일으키며 놀라곤 했습니다. 몸도 움찔거렸지만, 무엇보다 요동치는 심장 때문에 힘들었지요. 그래서 이 어려움을 담당 선생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괜찮아 질수 있는지 여쭤봤지요. 선생님은 제 물음에 당연히 괜찮아질 수 있다고, 저 외에도 살면서 충격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며 그 사람들이 다 못 지내는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그 광경을 2만 번 떠올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말에 따랐습니다. 처음에는 끔찍한 감정이 들었지만 그 감정에서 도망치지 않고 그것을 느꼈으며 계속 반복했고, 시간이 지나자 점차 나아졌고 지금은 괜찮아 졌습니다. 이 방법을 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담당의를 만나 상의 후, 선생님이 제시하는 방법을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픈 감정에서 도망치려하지 않고 그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엄마를 떠나보낸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봐도 결코 틀리지 않은 사실이었지요. 하지만 당시 (지금도 그렇지만) 사회적으로 자살은 화두에 올리기 어려운 이슈였고, 저는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 저의 마음 상태와 그와 직결되는 엄마의 사건에 대해 나눌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 당시 저는 자신의 진솔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며, 타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일상적인 말만 하려 했던 것입니다. 별일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별일이 마음을 짓누르고 있음에도 별일 없던 척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의사선생님과 심리상담 선생님하고만 엄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나눌 때마다 터져버리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상에서는 꾹꾹 눌러왔으니까요. 가족 내에서도 엄마의 죽음 이야기는커녕 엄마의 모든 재미난 에피소드조차 나누지 못했습니다. 마치 엄마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지 말자는 무언의 약속이 은연중에 맺어진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런 모습을 저의 담당 선생님은 좋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말해도 괜찮다고, 나눠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 내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이야기하고 다녔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말하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저의 내면에 고통의 이글거림이 강렬했던 것입니다. 저는 때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고, 침울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기도 했으며, 사뭇 진지한 분위기에서 제 스토리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정말 많이 나눴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적어도 50명을 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누고 싶은 갈망은 점차 줄어들었고, 나누게 되는 횟수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졌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사람들과 많이 나누면서 아픔이 줄어든 것은 맞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저의 고통에 너무 집중했던 나머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네, 저는 너무 무분별하게 이야기를 쏟아냈습니다. 그래서 적잖은 사람들을 당혹케 했고, 놀라게 했고, 침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제 말은 상담사 외의 다른 사람들과는 나누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족이든 친한 사람이든 같이 나누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상대를 내 이야기를 쏟아내는 감정의 쓰레기통이 아니라, 지금 이 어려운 시기에 나와 함께 있어주는 고마운 동역자로 여기며 나누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자신이 힘든 마음을 지니고 있는데 혹시 들어줄 수 있는지 같이 나눠줄 수 있는지 물어보며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눌 때 그냥 감정을 상대에게 내던지는 나눔보다 훨씬 건강하고 바람직한 나눔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제 누나에게 뜬금없이 “나 힘들어”하는 것보다, 서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엄마 생각하니까 슬퍼, ~했던 기억 떠올리니까 더 보고 싶어”하고 나눌 때, 내면에 웅크린 아픔이 상쇄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살 유가족 모임’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곳에 가서 아픔을 함께 공유하고 서로의 일상을 나누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는 유가족 모임에는 나가보지 않았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상담을 공부할 당시 자살유가족을만나 상담해줬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동병상련으로서 공감해주며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저를 만났던 그 분은 지금은 결혼하여 잘 살고 계십니다. 그분에게는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했던 유가족과의 나눔이 위로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추가로 보건복지부에서 운영하는 자살유가족을 위한 웹사이트 <따뜻한 작별>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사별이후 치유와 회복에 대한 정보, 그리고 각종 법적&행정적 지원, 상담지원 등의 서비스를 제공해줍니다. 정말 나눌 곳이 없어 어려우시다면 상담전화 1393으로 연락하시면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웹사이트 링크를 걸어 놓습니다. http://www.warmdays.co.kr/ )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당시 저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나만큼 힘든 일을 겪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 생각이 도움이 됐던 적은 없던 것 같습니다. 본래의 일상을 회복하고 안정적인 마음을 다져가려 할 때도, 사람들을 만나며 사회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일상을 회복하길 원하지도 않고 사람들과 원만한 사회생활을 원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비극의 주인공이었으니까요.
저는 실제로 제가 영화나 드라마 한 가운데 주연으로 있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아주 슬픈 영화 말이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만 여겨졌습니다. 아니면 영화의 조연으로 보였지요. 그러니까, 세상에 오직 나 한 사람만 가장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저 자신을 비참함의 늪으로 계속 빨려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좋은 것들도 제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제 주위사람들도 저의 우울한 영향력 아래 함께 침울해져갔습니다.
지금의 저는 그때의 저의 모습을 ‘역(逆)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하고 싶네요. 마치 한 분야의 정상에 선 사람이 교만해지면 타인의 조언을 무시하는 것처럼, 저도 저 스스로를 슬픔에 있어 정점에 있는 사람이라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나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으니 조언과 위로 따위는 무시해버렸고, 내가 건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쓸모없고 유치한 것으로 치부했습니다.
비참함은 효모와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빵 전체를 부풀리듯, 일상 모든 영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비참함의 지배를 당하는 것과 진심으로 애통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슬픔을 느끼는 것과, 나 자신을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것은 가장되고 과장된 가짜 슬픔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의 진짜 아픔이 위로되지 않으면 그것은 계속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가장되고 과장된 슬픔을 일으키는 비참한 마음은 걷어내며, 나 자신이 진실로 느끼고 있는 아픔은 무엇인지 면밀히 살피는 과정이 훨씬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안 그래도 저는 어려서부터 회의적인 사람이었는데, 어머니와의 사별 이후로 그 자세는 더 심해졌습니다. 저는 개그프로그램을 보며 웃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웃기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웃을 수 없었던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개그맨의 행동이 왜 웃긴지, 그 웃음을 유발하는 원인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그리고 그 원인인자를 특정한 관점으로 바라봤을 때도 과연 웃을 수 있는지 등의 생각을 끊임없이 했던 것, 다시 말해 너무 진지했던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친구들은 웃긴 장면을 보고 그냥 웃기니까 웃은 것이고요.
저는 모든 일상에서 항상 그런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꽃다발을 들고 가는 사람을 보면 ‘며칠 못 가서 시드는 꽃은 왜 선물하는 거야?’라고 생각했고, SNS에 사진을 올리는 친구를 보며 ‘같이 있는 저 사람이랑 친하지도 않으면서 굳이 왜 친한 척 하는 거야 피곤하게’라고 하며 비난하기도 했으며, 사람들이 전시회에 가는 것을 보며 남는 것도 없는데 굳이 비싼 돈을 내고 관람하는 것이 아까워 보이기도 했습니다.
저의 관점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보이시나요? 어쩌면 저는 사실을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꽃은 시들고, 친하지 않는 사람들과 친한척하는 것은 피곤하며, 비싼 관람료를 다른 곳에 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말 자체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무엇에 집중하고 있었냐는 부분에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가 꽃은 시든다는 생물학적 정보, 대인관계에서의 피곤함이라는 심리학적 지식에, 거래에서 발생하는 경제학적 사실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의 관점은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느끼고 경험해서는 안 된다’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든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인해 나는 누리지 못하는 것 -누릴 것이 없어서가 아닌, 누릴 수 있지만 마음에서 거부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을 다른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모습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고귀한 가치들
문제를 깨닫고는 저는 스스로에게 누려도 괜찮다고 얘기해줬습니다. 느끼고, 감상하고, 표현해도 괜찮다고 말이지요. 호기심을 살려 이것저것 경험해보려 했습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평소 먹는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맛인지, 내가 밥을 어떤 속도로 먹고 있는지, 음식을 입 안에 넣고 얼마나 씹는지 다 느껴보았습니다. 전에는 이 모든 것들이 가치 없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이 행동들 하나하나가 모여 나의 피와 살과 에너지와 존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음식들 하나하나가 나의 식탁에 오기까지, 자연의 숨쉼과 농부의 노력과, 유통업자, 중개상, 도·소매상인 등, 정말 많은 사람과 기술이 함께 했다는 것까지 바라보며 감사하려 했습니다. 제 식탁 하나만 하더라도 고귀한 가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로 귀했습니다. 여행, 영화, 연극·전시관람, 맛집, 펍, 스포츠, 일 등등등..! 제 주위에 있는 수많은 위대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유로운 표현
위에서 말씀드린바 저는 느끼는 것도 잘 못 느꼈지만,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도 정말 서툴렀습니다. 기쁨, 즐거움, 안락함, 평온함, 짜증, 분노 등의 감정을 잘 느끼지도 못하고 표현하지도 못했지요. 하지만 표현하기로 했습니다. 스스로에게도 표현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웃기도하고, 흥얼거리기도 하고, 즐거울 때는 몸을 흔들기도 했습니다. 조용할 때는 가만히 앉아 평온함을 느끼기도 했고, 불편한 일이 생기면 그것을 말로 표현했고, 짜증나는 일이 있거나 부당함을 느낀 일에 대해서는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분노를 내기도 했습니다. 온당한 일에 대해 표현할 때도 단지 화를 냈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곤 했는데, 그런 마음이 들면 화내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크게 두 가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첫째는 말 그대로 그것이 익숙하지 않아서고, 둘째는 내 표현이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잠시 이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익숙하지 않음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표현을 반복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커피를 아주 좋아합니다. 하지만 14년 전,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처음 마주했을 때, 최악의 맛을 경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커피 맛이 제게 익숙하지 않아서였지요. 첫입에 맛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점차 하루하루 커피 맛이 다르게 느껴졌고, 익숙해지며 맛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달리기를 좋아하는데요. 달리기 또한 처음부터 잘 하기 어렵지요. 달리기를 잘 하기 위해서는 우선 걸을 줄 알아야 했고, 잘 걷기 전에는 걸음마를 떼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표현을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표현에 익숙해지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내 느낌을 알고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처음부터 잘 됐던 것은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노력함에 따라 좋아질 수 있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 글 <<나다운 나>> 5편에서 다뤘습니다.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다운 나 5편 - https://brunch.co.kr/@littlelewis/21)
둘째,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그래서 아무 표현도 못하는 것이 오히려 표현하는 것보다 나쁘다는 것을 인식하려 했습니다. 저는 기쁨, 짜증, 분노와 같은 정서적 표현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연스러운 표현을 억누르기고 결국 강박과 공항을 느끼는 상태까지 가고는 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에 우울감에 묻혀 살기도 했고, 때로는 억눌린 짜증이 폭발하여 걷잡을 수 없이 화를 내며 격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생각과 감정을 자연스레 표현하면 그것들이 정리되고 해소됩니다. 하지만 상대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 내 표현들을 억누르면 결국 상대를 더 힘들게 하는 모습들을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보다, 덜 나쁘다고 생각되어지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저의 솔직한 생각과 감정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떨렸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운 좋게도 제 주위에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고, 정서적으로 건강한 친구들은 저의 자연스런 표현을 잘 받아주었고 우리는 예전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생각과 마음이 점차 안정되며 괜찮아질 때 즈음, 아직도 회의적인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죄의식’이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잘했으면 어머니를 떠나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크게 뉘우치고 있었고,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엄마를 떠나보낸 내가 어떻게 웃고 즐길 수 있어’라는 말을 되뇌며 늘 침울했습니다. 당시 밥도 잘 안 먹었던지 74kg이었던 몸무게는 62kg으로 줄어있었습니다. 2주 넘게 햇빛을 보지 않고 방안에 나를 가두고 지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완전 폐인이 된 것입니다. 이때 저는 제 정신이 아니게 됐습니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던 저는 누나에게 해코지 하려 했고, 칼을 움켜쥐려는 제 자신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어 제 발로 정신과에 찾아갔습니다.
죄책감으로 자신을 모든 것으로부터 가둬버리는 것은 좋은 애도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을 오랫동안 슬퍼했다면, 그 후에는 일상을 살아야 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엄마를 잊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려 했던 것입니다. 제가 만약 죄책감으로 계속 침울해하고 우울해하려 했다면, 제게는 부정적인 변화만 생겼을 테고, 그렇게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내게 가까이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도 부정적인 피해를 줬을 것입니다. 나와 내 주위 사람을 위해 저는 더 건강해져야 했고, 저의 내면을 챙기며 타인과 함께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려 했습니다.
또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내 피폐한 모습을, 정신이 이상한 모습을 엄마가 보면 과연 기뻐할까?’라는 생각을 말이지요. 그 생각을 하며 저는 웃었습니다. 혼날 것이 빤했기 때문입니다. 갈비뼈가 도드라져 보이는 제 모습을 보며 엄마는 분명 “왜 이렇게 말랐어!”하며 제 머리를 쥐어박고는 손수 음식을 차리셨을 것입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드는 모습을 기뻐할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제 엄마도 내가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순간순간을 평온과 감사와 기쁨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바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회의감과 죄책감으로 나를 죽이는 잘못된 애도를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빨리 나아지길 바라는 생각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경주에 참여한 것도 아니니 말이지요. 오히려 그렇게 서두르는 것이 올무가 되어 발목을 붙잡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행복하려고 발버둥 치면 도리어 불행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행복은 행복 그 자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모습과 일상에 만족하며 그것들에 충실히 임할 때 다가오는 것이니까요. 이 아픔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얼마나 나아졌는가에만 집중하면 결국 잘 변하지 않는 듯 하는 내 모습에 실망감만 늘겠지요.
그래서 느려도 괜찮으니까, 당장 완벽해지지 않아도 되니까 꾸준히 갈 길 가자는 생각을 갖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나와는 많이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과의 비교 따윈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도달해야 하는 목표치는 특정한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내 모습과 내 진심에 충실한 것이 되었습니다.
멀리 가지는 못하더라도 달팽이처럼 아주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저의 모습을 응원하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마주하기를 바라며
from. Little Lewis
ps. 어느 누구도 똑같은 모습과 환경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저와 같은 과정을 밟지 않고도 어려움을 극복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따라서 꼭 제가 말한 방법이 옳은 것만은 아닙니다. 만약 저의 이야기가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면 그냥 무시하세요.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숨기는 것이 아닌, 진실한 마음과 행동이라는 것만은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서 있는 당신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