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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Mar 20. 2020

혼자가 편한 게 아니라 같이 있는 게 불편했던 거다 2

야 너두 편할 수 있어

지난 글에서 얘기했다시피 이번 글에서는 사람을 기피하던 내가, 사람들이랑 있을 때 어떻게 자연스럽고 편할 수 있게 됐는지 이야기하려 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나는 성인(saint)도 아니고 세상을 다 산 지혜로운 노인도 아니며, 세 살 먹은 애도 아니라는 거다. 

 무슨 말인고 하면 첫째, 나는 사람들이랑 있을 때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며(모든 것을 내 자유대로 하려 한다면 건강한 관계는 생성될 수 없다.) 둘째, 불편함을 넘어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여럿 존재한다는 거다.      


얘기가 나온 김에 위의 토픽부터 다루며 시작하겠다. 




1. 완벽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내 친구 중에 할 말 다 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사람들 앞에서 늘 여유가 있고, 자신 있어 보인다. 어렸을 때는 장난도 잘 치고 까불기도 많이 까부는 그의 모습을 ‘예의 없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그의 자신감은 당당함이 되었고, 누굴 만나든지 주눅 들지 않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많이 부러워했었다. 그러다 얼마 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그 친구도 사람 눈치 보며 산다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는 노는 데만 집중하느라 깊이 있는 이야기를 못했지만, 성인이 되어 그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도 말을 하기 전에 조심하고, 또 말을 하고 나서도 신경 쓰거나 후회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만 그와 내가 달랐던 점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데에 더 집중했고, 나는 타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에 더 집중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나는 타인에게 비중을 더 뒀던 거다. 쨌든 둘 다 완벽히 자유롭지는 못했던 거다.   


나는 ‘그 녀석’도 조심하고 눈치를 본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큰 위안이 됐다.


또 다른 친구

하루는 회사일이 너무 힘들어서(사람 때문에) 미국 사는 친구에게 카톡으로 하소연을 하기도 했었다. 그 친구는 질리도록 투덜거리는 내가 짜증났던지 한 방 먹여줬다.


야, 기업 총수라고 다 자기 맘대로 할 거 같냐
다들 눈치 보고 산다.




2. 불편함을 넘어 고통 주는 사람은 피한다.

사람이랑 있을 때 불편하지 않는 법을 말하면서 사람을 피하라니, 좀 이중적으로 들리지 않는가?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의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거리를 둬야 할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사람이 있다. 보통 그런 사람을 4차원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 자신만의 세계가 슬프고, 침울하고, 우울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다가가기 어려운 어두운 분위기나 아우라를 풍긴다. 그런데 만약 4차원이면서, 부정적이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그 부정의 수렁으로 끌어와 다른 모든 사람들도 자신과 같이 슬픔과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이런 사람을 어떻게 지칭해야 할까 - 부정수렁괴물?), 피해야 한다.  


특히 타인에게 잘 휘둘리는 사람이 위의 '부정수렁괴물'과 같이 있다 보면,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그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부정수렁괴물들은 삶을 회의적으로 보거나 염세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누리지 못한다. 만약 그런 사람과 같이 카페에서 같이 커피와 케이크를 먹고 있다고 상상하려 보라. 향기로운 커피와 맛있는 케이크는 고통스럽고 무거운 대화의 들러리가 될 뿐, 그 즐거움을 음미할 사치스런 기회 따위는 생기지 못할 거다.


웬만해서는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위와 같은 사람들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좋다. 그들과 같이 있다 보면 눈치 보는 습관이 확대 될 것이며, 자연스러운 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는 것을 학습하게 될 것이고, 역으로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을 내면화 하는 악습관을 들이게 될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면 타인이 슬퍼 보이게 될 시, 내게 아무리 즐거운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전혀 누리지 못하고 타인의 슬픔에 동조해야할 것만 같은 의무와 부담만을 지니게 되는 눈치쟁이가 다시 되어 버리는 거다.


자신 스스로가 건강하지 못하게 되면, 타인과 건강한 교제를 나눌 수 없게 되고, 나 또한 부정수렁괴물이 될 수 있는 거다. (부정수렁괴물은 어떡해야 할까? 이것에 대해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고, 그래서 정리 된 것도 없다. 나 자신이 부정수렁괴물이었다가 좋아지고는 있는데, 일단 지금은 내 코가 석자라 나 좋아지는 것에 집중하고, 나중에 정리가 되면 그때 가서 써봐야겠다.) 



3. 불편감을 자연스럽게 여기다.  

이제 일반적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사람들과 있을 때 불편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실 무조건 생길 수밖에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무조건이다. 정도만 다를 뿐이다. 아무리 나와 오래 알고지낸 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와 함께 있을 때면 감수해야하는 불편함이 분.명.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며, 인간이라 함은 자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아’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욕구와 그것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자신만의 의지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가 프로그래밍 된 로봇이 아닌 이상 서로의 뜻은 늘 같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동물을 사람처럼 생각하며 교감을 시도하고, 지능이 뛰어난 동물일수록 그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포기하거나 감수해야만 하는 불편이 늘어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덧붙여 말하면, 동물과도 늘 뜻이 맞는 것도 아니다.)


예로, 나는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데 내 친구는 과일케이크를 먹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만약 둘 사이에 후식 이야기가 아닌 더 깊고 복잡한 이슈가 있다면, 논쟁이나 다툼을 불사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을 거다. 이것을 어찌 불편함 없이 할 수 있겠는가?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불편함을 초래할 수 있다. - 물론 그런 것을 문제 삼는 것을 초월한(불편하지만 말하려 하지 않는 게 아닌, 정말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흔치 않게 있기도 하다. 이런 사람에 대해서는 굳이 말 할 필요가 없다. 알아서 잘 사니까. 


불편함이 없는 완벽한 관계는 없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영화 <<노팅힐>>에 등장하는 일반 사람 ‘윌리엄 대커’가 세계적인 여배우 ‘애나 스콧’과 결혼하여 살면서 불편함 없이 살았을 거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미 영화에서 그 둘의 진솔한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가? 그들이 자신의 모습을 거리낌 없이 보여줄 때 서로 행복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영화 얘기라고? 그렇다면 머릿속에 절대 다투지 않거나 서로 불편함 없이 살 것 같은 그룹이나 커플을 한 번 떠올려 보기를 바란다. 누구든 괜찮다. 감히 짐작하건데 떠오르지 않을 거다. 혹시 떠오른 사람이 있는가? 그들도 다투고 싸운다. 최소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편함을 감내하고 산다. 자신 있게 보장할 수 있다.      



4. 완벽함을 포기함 = 가장을 벗어던짐

앞서 말했듯 달콤함과 부드러움만 가득한, 거부감이 전혀 들지 않는 관계나 모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들이면 즉, 불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관점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된다. 상대방의 말이 공격성을 띠거나 나를 지적하고 평가하지는 않는지, 내 말이 상대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는지 신경 쓰기보다는, 대화의 주제와 내용에 더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함께 특정 활동을 하고 있다면 그 활동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완벽할 필요가 없는 관계는 경직되어 있는 질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유동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해, 내가 지속적인 불편함을 느끼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면 얼마든지 그것을 교정하고 고칠 수 있다는 말이다. 건강한 관계에서 ‘무조건’이라는 공식은 ‘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음’에 대입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말이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고, 특정한 위치나 성별을 지닌 사람의 주장을 무조건 들어 줘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거다.


주변에 이런 유동적이고 유쾌한 관계가 없는가? 너무 낙심할 필요 없다. 문화는 만들어가는 거니까. 당신이 그런 존재가 되면 된다. 미리 경고하는데 단 번에 될 거란 기대는 안 하는 게 좋다. 한두 번 만에 되는 쉬운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완벽을 포기하고, 가장을 벗어던지며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주고, 함께하는 대화와 그 활동에 몰입해보라. 그것이 반복되다 보면 아주 좋고 건강한 문화를 지닌 모임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



5. 손해를 당해보기로 하다.

친구라면 나 자신을 스스럼없이 보여주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상대가 직장 상사라면? 동아리 선배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유교문화와 눈치문화가 아주 견고하게 발달해 있다 보니, 내가 아무리 분위기를 주도해나가고 싶어도 문화와 환경이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어 여간 힘든 상황이 아닌 거다.      


우리는 눈치문화에 어느 정도 적응해있다. 그래서 웬만한 일들은 ‘그러려니’하며 넘긴다. 하지만 어쩔 때는 눈치를 보는 것으로써 끝나지 않는 경우들도 있다. 자존심을 후비고 인격을 침범 당하는 상황, 원하지 않게 거짓과 기만을 지속해야 하는 상황 등이 그런 류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런 상황 가운데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한다. 분위기에 휩쓸려 가다가 피폐해지기 마련이며, 결국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그 집단을 떠나게 된다.      


우리가 아무것도 못하는 이유는 ‘손해 볼 것이 두려워서’가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모른다. 기만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자신을 보여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게 될지. 우리는 확인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른다. 그 손해는 과연 우주만큼 광대할까? 하늘만큼 높고 바다만큼 깊을까? 인생 망하게 될까? 아마 그 손해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만큼 크지 않을 거다. 만약 기대보다 크더라도 당신은 그 손해를 감당해낼 수 있다.      


걱정은 존재하지도 않는 일을 만들어 역동적인 당신의 삶에 제동을 거는 브레이크다.      


손해 보지 않으려고 절절매는 것은 오히려 존재하지도 않는 손해에 집중하게 만든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손해를 보더라도 다시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며 금방 일어서게 된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여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할 수 있을지 찾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되자.


손해는 언제 어디서든 의도치 않게 생겨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냥 해보자!


당신을 응원한다.




메인이미지 - Pixabay로부터 입수된 Diese lizenzfreien Fotos darfst du zwar verwenden님의 이미지 입니다. 

사진1 - Pixabay로부터 입수된 Vinson Tan ( 楊 祖 武 )님의 이미지 입니다. 

사진2 - Pixabay로부터 입수된 Narcis Ciocan님의 이미지 입니다. 

사진3 - Pixabay로부터 입수된 Free-Photos님의 이미지 입니다. 

사진4 - Pixabay로부터 입수된 Gerd Altmann님의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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