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어도 같이 있어도 편해지자
수개월 전, 아버지와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눌 때였다. 무슨 얘기를 하다가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께 “난 사람들 만나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게 편해”라는 말을 했고, 곧이어 아버지는 “나도”하며 내 의견에 동감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혼자 있는 것이 편하다는 생각을 다시 생각해보기로 한 것이. 나는 아버지와 원수지간은 아니지만, 아버지를 나의 ‘반면교사’로 삼고 있기 때문에(아버지에게는 비밀이다.) 어느새 아버지가 옳다고 여기거나 긍정하는 모든 것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던 거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의 정치적 이념, 신앙관, 삶의 가치 등을 재조명하며 아버지와 나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의구심을 품었던 거다. 내가 아버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있다니! 기분이 살짝 언짢았다. 왜냐하면 교만하게도 나는 대인관계적인 부분에서, 정서적 교감을 하는 부분에 있어서 아버지보다 스스로 낫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공감을 당하다니, 재조명되어야 할 토픽이 고개를 빼꼼 내민 꼴이다. 그래서 써보기로 했다. 나는 왜 혼자 있기를 좋아하게 됐는지.
나는 혼자 있는 게 편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공부와 일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 하는 일’로 가득했던 것 같다. 나는 방 안에서 홀로 게임을 즐겼고, 카페에서 홀로 책을 읽거나 글을 썼으며, 홀로 하는 운동과 산책을 즐겼고, 홀로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지금 혼자 산지 만 8년이 되어 간다. 고등학교 시절 1인 기숙사를 사용했던 기간까지 합치면 인생에서 혼자 살았던 시간은 10년이 훌쩍 넘는다.
그렇다고 어려서부터 늘 혼자 있기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주말에는 친구들과 같이 살다시피 했다. 한 친구 집에서 여러 명이 모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다음날 아침까지 어울려 놀았던 거다. 우리는 시끄러웠고, 부산스러웠으며, 엉망진창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즐거웠다.
중학교에 올라가고 또 고등학교에 들어가며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됐다. 나는 여러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하지만 뭐랄까, 초등학교 때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놀다보니 자연스레 내 주위에 친구들이 생겼던 반면, 중고등학교 때는 달랐다. 친구를 만들고 그들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좋아하고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중고등학교 때 사귄 친구들과는 깊이 친해지지 못했고, 그들 중 지금까지도 연락하는 친구는 없다.
초등학교 때의 친구들은 주말이면 우리 집에서 밤을 보냈지만, 중고등학교 때의 친구들 중 우리 집에 데려와 재워준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아마도 중학교 시절부터, 타인을 많이 의식했던 것 같다. 남중과 남고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타인들 사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기질은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됐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성인들의 관계질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복잡한 룰과 매너로 유지되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의 매너가 학생 시절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면 성인집단에 어울리지 못하고 도태되는 거다. 성인들의 세계는 냉혹했다. 그리고 타인의 눈치를 많이 보는 나는 그 속에서 숨이 막혔다. 그 숨막힘은 학생시절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매너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필요 이상으로 그것들을 지켜야 하기에, 그것들은 결국 의무 이상의 짐이 되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를 짓눌렀던 거다.
나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그들의 암묵적인 룰과 매너를 잘 알고 지키는 사람으로 비춰지기 위해 얼마나 신경 쓰고, 에너지를 쏟아내며 결국 집에 돌아와서는 피로감에 얼마나 지쳐했던가? 그러면서 점점 필요 이상으로 에너지를 쏟아내야 하는 모임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런 만남들을 하나 둘 씩 줄여나갔다. 대신에 혼자 쉬고, 놀고, 즐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중에는 아주 가끔 어린 시절의 절친했던 친구들을 만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만남을 갖지 않게 됐다.
그래도 윌슨 없이는 안 됐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주인공 “척 놀랜드”는 무인도에 갇혔다. 그곳에는 냉혹한 자연밖에 없었다. 그는 모든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고, 또 그걸 썩 잘 해냈다. 4년간의 혹독한(?) 무인도 생활 끝에 그는 탈출에 성공한다.
나는 그가 4년간 무인도에서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버팀목은 “윌슨”이었다고 생각한다. 윌슨은 바닷물에 떠밀려온 배구공에 눈 코 입을 그리고 머리에는 풀을 심어 만들어낸 어쭙잖은 얼굴모형이며, 주인공 놀랜드의 친구였다. 놀랜드는 장작을 패든, 음식을 먹든, 잠을 자든 윌슨과 함께하며 윌슨과 대화했다. 영화 중반부를 넘어가면 놀랜드가 윌슨을 가상의 친구로 생각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친구로 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만약에 윌슨이 없었다면 놀랜드는 짐승 같이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최소 미치지 않았을까. 자아는 타자가 없으면 더 이상 자아가 될 수 없다. 남이 없으면 나를 인식할 수도 없는 거다. 놀랜드가 단지 자연을 보고, 음식을 먹고, 배설하고, 잠을 자는 일만 했다면, 그에게는 생물학적인 생명을 살리기 위한 감각만이 발달될 뿐이었을 것이다. 후에는 언어도 사라지고 감각을 표출하는 '울음'만을 부르짖게 되겠지.
윌슨이 있었기에 ‘그것’과 대화를 하며 내면에 감각으로만 존재하는 생명에 대한 욕구를 언어로 구체화할 수 있었고, ‘단지 무엇인지 모를 갈망’이었을 느낌을 집에 가고 싶은 마음과 가족을 만나고자 하는 욕구로 키워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구체화된 갈망으로 그는 무인도 탈출 이라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내지 않았는가!
놀랜드는 의도치 않게 무인도에 갇혔지만, 나는 스스로를 무인도에 가뒀다. 그리고 ‘역시 혼자 있는 게 역시 좋아’라 되뇌며 살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혼자 살았던 게 아녔다. 나 또한 윌슨과 살았다. 내 주변에는 내가 붙들고 있는 윌슨들이 참 많다. 게임, SNS, 유튜브, 카톡, 일기장, 등등등... 나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기준선을 넘지 않는 것들을 내 주변에 놓고 따로 섬을 만들어 살고 있었던 거다.
나도 참 이기적이고 앞뒤 안 맞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타인과의 만남은 피하면서도 타인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얻고자 했다는 거다. 그리고 나는 그 섬 안에서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딱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내 정서적 욕구를 채워주기를 바라며 그것들을 ‘통솔’해왔다.
이 부분에 있어서 타인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위험도를 보여준다. 타인은 예측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나를 비난하거나 공격할 수도 있다. 두려움이 많은 나는 타인을 두려워했고, 솔직히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두려워했다. 내 약점이 지적당하고 탄로날까봐서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왔기 때문에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부담스럽지 않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나는, 나를 보여주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 나는, 새로운 집단에 들어가거나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이 몹시 긴장되고 피곤한 일이었던 거다. 그래서 나는 별다른 요구 없이 내 뜻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윌슨을 찾게 된 거다. 아니면 윌슨 같은 사람을 찾던가.
상대의 눈치를 보고, 말을 조심스레 가려서 하고, 자기주장이 없으며, 자신의 기분과 상관없이 상대방의 기분만을 좋게 해주려하는 사람들과는 금방 친해졌다. 성인이 되어 친해지거나 나름(?)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었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리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좀 달라졌다. 내 일상에서 윌슨의 비중이 줄어들고 ‘진짜 사람들’의 비중이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예전만큼 불편하지도 않고, 오히려 사람들과의 만남이 유쾌하고 즐거워진 거다. 어떻게 이리 됐는지는 다음 글에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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