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눅과 소확행은 닮은 꼴일까
그녀는 평상에 앉아 대접에 남은 국물을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먹고 있었다. 골목길 보다 한 뼘 정도 내려앉은 반 평도 안 되는 마당에는 평상과 2단 선반이 있었다. 선반 안에는 전자레인지와 양념병들이 놓여있었다. 평상 옆 열린 방안에는 짙은 갈색 융모 담요가 깔려 있었다. 빤히 보기가 민망하여 얼른 고개를 돌렸다. 대문도 없는 쪽방 집의 생활상을 눈앞에서 맞닥뜨릴 줄이야.
캄빌리지에 다녀오는 길이다. 구글 맵을 켜고 올드 타운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어 숙소에 도착하기 직전 삶의 민낯을 만났다. 골목길에서는 대여섯 살로 보이는 꼬마 세 명이 달리기 시합을 하는 중이었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숙소로 향했다. 그 후로 오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흘끔흘끔 골목길 옆 집들을 훔쳐보았다. 나 같은 관광객이 신경 쓰였는지 앞서 본 집은 빨랫줄에 담요를 널어 골목과 집의 경계를 만들어 놓았다.
며칠 전까지 머물던 님만해민의 한 카페 통창으로 보이던 집이 떠올랐다. 담벼락에는 주황빛 꽃이 가득 피어 있었고 대문은 금색의 휘장으로 번쩍거렸다. 나무를 심어 놓은 넓은 마당에는 차고가 있었고 이층으로 된 집의 창문마다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는데 테슬라 한 대가 문 앞에 도착하자 대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일까 궁금했다. 마음 한 켠이 이상하게 아파오는 이 순간에 그 집이 떠오른 건 무슨 이유인가. 어쩌면 치앙마이에 있는 내내 가슴 한 구석에서 돈과 사람에 대한 생각이 피어올랐는지도 모르겠다.
태국 돈 바트화를 쓰면 한화로는 얼마인지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계산하게 된다. 1바트는 43원 정도다. 한 시간 넘게 줄 서서 먹은 창푸악 수끼 한 그릇이 59바트였다. 한국 돈 3000원이 안 되는 값이다. 태국인들의 일반 하루 최저 임금은 300바트라고 한다. 한국 돈으로 약 13000원이다! 우리나라 최저 시급 10030원과 비교해 보면 태국 현지 물가가 체감된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의 치앙마이에 있다 보니 사람들의 빈부 격차가 극명하게 느껴진다.
태국은 최상위 20%의 소득이 전체 소득의 45%를 차지하는 전 세계 소득불균형이 큰 나라 3위에 기록된 나라이다. 백화점이나 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면 우리나라 음식 가격과 비슷하거나 더 비싼 경우도 있다. 하루 임금 300바트를 받는 사람들이 600바트 햄버거를 사 먹을 수 있을까? 상점이나 관광지를 걷다 보면 한 구석에서 플라스틱 통에 든 밥에 비닐봉지에 든 반찬을 곁들여 먹는 것을 왕왕 볼 수 있다. 경제적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지 못하는 대다수의 태국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태국 사람들을 관통하는 제1의 정서가 ‘사눅‘이라고 한다. 사눅은 ’잔잔한 즐거움‘이란 뜻이다. 즐거운 것이 단순한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핵심이자 사람 간의 관계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나가는 의미로 여겨진단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미소 띤 친절한 태국 사람들의 정서에 깔린 개념이 바로 사눅이었나 보다. 하지만 사눅을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계급 사회에 순응하고 체념하는 정서로도 볼 수 있다. 내재된 절망감에 소소한 즐거움을 중요시하는 것만이 행복한 길이라 여기는 건 아닐까. 이는 한국에서 유행어처럼 화자 되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떠오르게 한다. 계급이동이 어려워진 팍팍한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우니 눈앞의 소소한 행복에서 만족을 찾는다는 사눅의 또 다른 해석처럼 말이다.
치앙마이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삶은 다양했다. 하루 종일 화장실에서 청소하고 있는 젊은 여성, 공사장에서 벽돌을 나르던 소녀, 쪽방 앞 평상 위에서 저녁을 먹던 가족, 고급외제차에 오르던 청년, 하루 종일 뜨거운 팬 앞에서 국수와 야채를 볶던 아저씨, 마켓에서 수제 두유를 만들어 팔며 빨대까지 까주던 아주머니, 그랩과 볼트로 만났던 여러 명의 기사분들.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들의 삶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