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생텍쥐페리
지난주 꽃가게를 하는 지인을 도와 종일 꽃 포장을 하고 왔다. 졸업 시즌이라 대량 주문을 받았는데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양이라 손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 고등학교에서 졸업생 300여 명에게 꽃 한 송이씩을 선물하려고 대량 주문을 해왔다고 한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호기심도 생기고 예쁜 꽃을 볼 수 있으란 마음에기분 좋게 달려갔다.
집에 들어가니 거실 바닥에 꽃 뭉치가 담긴 둥근 플라스틱 양동이가 수십 개가 있었다. 붉은 장미 다발, 연한 분홍색이 도는 흰 장미 다발, 베이비핑크색 거베라 다발, 진한 노랑 거베라 다발, 카네이션, 백합, 국화 등 거실이 온통 꽃밭이었다. 이렇게 많은 꽃을 본적이 언제였던가. 꽃향기가 진하게 배어 있는 거실에서 꽃 포장 작업을 시작했다.
장미 줄기의 잎사귀와 가시를 제거하여 포장하기 좋은 상태로 만드는 일이 첫 번째로 할 일이었다. 가시가 없는 두 번째 마디를 왼손 엄지와 검지, 중지로 잡고 잎사귀를 꺾어 버렸다. 그리고 가위로 굵은 가시는 잘라내고 잔가시는 가위 날로 살살 긁어 줄기를 매끈하게 만들었다.
꽃집에서 장미를 사거나 선물로 받아 보기만 했지, 장미를 다듬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내 손을 거쳐 잎과 가시가 잘려 매끈해진 줄기 위에서 꽃잎만 남아 진한 향기를 뿜어내는 장미 수십 송이를 보고 있자니 문득 어린 왕자 별에 있던 장미 한 송이가 떠올랐다.
자신의 별을 떠나 지구에 도착한 어린 왕자는 장미 정원을 만나게 된다. 자신의 별에 있던 장미꽃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꽃인 줄 알았는데 정원 가득 피어 있는 똑같은 꽃들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의 꽃이 그저 평범한 장미 한 송이였다는 걸 알게 된 어린 왕자는 풀숲에 엎드려 엉엉 소리 내며 울고 만다. 어린 왕자는 무릎 높이의 화산 세 개와 평범한 꽃 한 송이로는 대단한 왕자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것이다.
무수한 장미를 보고 기겁하여 울던 어린 왕자의 마음과 같았던 적이 있다. 23년도에 글쓰기에 입문하고 다음 해에 처음으로 종이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책을 쓸 땐 그야말로 ‘calf love’에 빠진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책을 완성하는 것만을 향해 내달렸다. 좌충우돌하며 책을 완성하고 나서 출간을 위해 투고할 출판사를 알아보려고 교보문고를 찾았다.
그동안 편안함과 즐거움을 주는 휴식과 오락의 장소였던 교보문고가 시장 조사가 목적이 되니 다르게 보였다. 수십 권의 책을 들추며 마지막 장 혹은 앞장에 적힌 출판사 이메일 주소를 핸드폰으로 촬영했다. 처음 보는 출판사가 꽤 많았고 내 책과 비슷한 주제의 책들이 무수히 많았다. 조용한 전쟁터라는 말이 떠올랐고 매대에 누워 있는 수많은 책에서는 ‘나 좀 읽어주세요, 나 좀 사가세요.’라는 간절한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비슷한 책들이 이미 많이 나와 있는데 내가 써낸 책 한 권이 무슨 의미를 지닐까. 내가 쓴 책을 누가 읽어주기나 할까. 투고를 하기도 전에 풀이 죽었다.
여우를 만나 서로를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된 어린 왕자는 다시 장미꽃들을 찾아가 말했다.
“너희들은 내 꽃과 조금도 닮지 않았어. 물론 내 꽃도 다른 사람에게는 너희와 똑같이 생긴 것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그 꽃 한 송이가 내게는 너희들 모두보다도 더 소중해. 나는 그에게 물도 주고, 바람막이도 만들어주었으며 유리 덮개도 씌워 주었어. 꽃이 하는 불평의 소리나 자랑의 소리 심지어 침묵까지도 들어주었어. 그 꽃은 내 꽃이니까 말이야.”
내가 쓴 책 한 권이 무수한 고전 명작들보다 나에게 의미를 갖는 이유는 아마 내가 썼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나의 경험에 의미를 담아보려 애쓰며 보낸 숱한 시간의 결과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많이 읽히고 팔리지 못하고 서가 한 구석에서 조용히 서 있다가 퇴장하게 될지라도 몇 사람에게 짧은 여운만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책이 세상에 나온 역할은 다했다고 등 두드려주고 싶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출간 한참 후에야 정리된 마음이다.
수백 송이의 빨간 장미, 흰 장미, 분홍 거베라, 노랑 거베라 등의 꽃들을 다듬으며 빨간 장미가 꽃의 여왕으로 불리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거베라는 크고 화려한 꽃 아래로 매끈한 줄기가 깔끔해 보이지만 줄기가 조금만 얇아지는 구간이 있어도 맥을 못 추고 할미꽃처럼 고개를 숙인다. 흰 장미는 야리야리한 꽃잎 색처럼 얇은 줄기에 잎이 무성하여 잎만 제거하여도 쉽사리 줄기가 꺾일 수 있어 조심조심 다뤄야 했다. 빨간 장미는 잎과 가시를 제거해도 탄탄한 줄기가 새빨간 꽃잎을 지탱해 주어 비닐로 포장하고 상자에 담는 마지막 순간까지 흐트러짐 없이 도도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꽃송이를 다듬어 보관 처리하고 비닐 포장과 상자에 넣는 작업까지 마무리하여 다음 날 학교까지 300송이 꽃을 무사히 배달할 수 있었다. 내가 손수 가시를 다듬고 애지중지하며 포장한 장미 한 송이가 누군가의 졸업을 축하해 주는 기쁨의 선물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다. 기쁨도 향기도 오래오래 갔으면 한다. 조용하지만 마지막까지 힘과 향기를 잃지 않았던 빨간 장미 한 송이처럼 오랫동안 힘 있고 향기로운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그 글이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닿을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