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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더러운 물이 되어도 우리는 친구야?

안녕 달 <눈 아이>

by Little Prince

“내가 더러운 물이 되어도 우리는 친구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햇볕에 녹아 사라지는 눈사람의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그동안 숱하게 보아온 작아지고 초라해지던 눈사람의 외침은 이런 것이었을까. 그저 눈밭에서 신나게 눈을 굴려 쌓아 올려 만든 두 개의 눈덩이일 뿐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흙 묻은 얼굴로 작아지다가 녹아 사라져 버리면 그만인 눈사람이었다.


내가 더러운 물이 되어도 친구들은 나를 친구라 여겨줄까. 내가 만약 형편없이 작고 초라해져도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남아 있을까. 지금과 같은 조건과 환경이 아니라면 내가 맺고 있는 관계는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재 내가 맺고 있는 관계를 지속해주고 있을까.


눈이 소복하게 내린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아이는 눈사람을 만난다. 아이가 눈사람에게 눈을 뭉쳐 팔과 다리를 만들어주자 눈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 입과 눈을 그려주자 말을 하게 되고 볼 수 있게 된다. ‘눈 아이’가 된 것이다. 아이는 배고파하는 눈 아이와 눈 빵을 만들어 함께 먹는다. 빨간 장갑을 한 짝씩 나눠 끼고 눈 쌓인 언덕을 올라 책가방으로 눈썰매도 탄다. 하지만 한겨울이 지나 눈이 녹기 시작하며 눈 아이는 점점 작아지고 더러워진다. 결국 겨울이 끝나고 눈 아이는 사라지고 만다.


겨울의 끝에서 더러운 물이 되어도 친구냐고 물어보는 눈 아이에게 아이는 떨어진 팔을 다시 만들어 붙여주며 “응”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눈 아이가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둘은 함께 눈썰매를 타고 숨바꼭질 놀이를 한다.


삶은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하는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 존재가 누구이고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사랑하는 가족일 수도 연인이나 친구일 수도 있다. 어쩌면 반려동물일 수도 있고 식물일 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일일 수도 있고 학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 인생은 타자와의 관계를 만들고 다져가는 여정이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좋은 대상을 만나 소중한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일단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을 만나는 행운이 따라주어야 한다. 새하얀 눈밭에서 뽀도독거리는 눈사람을 발견하고 스스럼없이 다가간 아이의 용기가 있었기에 둘의 만남은 가능했으리라. 아이가 눈사람에게 팔다리와 눈과 입을 만들어주고 눈 아이가 되어 함께 놀았듯이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주는 대상을 만난다는 것은 인생의 큰 축복이다.


그리고 서로의 빛나는 부분을 발견해 주고 정성을 쏟는 시간이 쌓일수록 둘의 관계는 특별해진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둘만의 추억이 생기고 사이는 깊어진다. 아이와 눈 아이는 함께 놀고 다치면 위로도 해주며 헤어지는 마지막까지도 숨바꼭질하며 둘은 시간을 보냈다. 즐거울 때나 어려울 때나 서로를 생각하고 함께하려는 노력 없이는 관계를 유지할 수도 깊어질 수도 없다.


또한 무엇보다 상대가 아닌 나를 믿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 내가 더러운 존재가 되면 상대는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 그래도 함께했던 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서로에게 돈독한 관계를 구축했다면 우리 사이는 오래 지속될 거라고 믿어야 한다. 마지막까지 관계에 최선을 다했다면 혹여나 상대가 떠나더라도 후회는 없으리라.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기에 이별은 숙명과도 같다. 인간의 숙명처럼 관계도 태어나고 스러지는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 다만 함께하는 동안만큼은 사랑하는 존재와 소중한 관계를 이어가고 싶을 뿐이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이 더러운 물이 되어도 깨지지 않을 결속력을 지녔으면 하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동안 아이는 눈 아이를 기다린다. 그리고 겨울이 되어 둘은 다시 만난다. 더러운 물이 되어 사라진다 해도 함께한 소중한 추억이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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