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돔베고기와 고기국수, 고등어회, 흑돼지 삼겹살, 통갈치구이와 조림, 성게미역국. 내가 좋아하는 제주 음식을 먹으러 어느 맛집에 가볼까. 지난번 갔던 집에 또 가볼까. 요즘 뜨는 바다 전망 좋은 카페는 어디지. 성산 일출봉에서 일출 보고 일몰은 어느 해변에서 보는 게 아름다우려나. 지난번 갔던 새별 오름 좋았는데 이번에는 다랑쉬 오름 가볼까. 동문 시장 오메기떡은 배송 주문하고 와야지. 올가을 제주 여행을 앞두고 설레던 참이었다.
언제 가도 좋은 제주였다. 아침에 눈 뜨면 푸른 바다를 볼 수 있고 조금만 차 타고 이동하면 울창한 숲길을 거닐 수 있는 곳, 맛있는 식사 후 바닷가 예쁜 카페에서 반짝이는 윤슬 보며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 그래서 언젠가는 한달살이 해보고 싶은 낭만 가득한 아름다운 섬이었다.
하지만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난 지금은 더 이상 예전의 제주가 아니다. 한겨울에도 진분홍 꽃잎 흩날리는 단단한 동백나무들과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는 유채꽃줄기가 자라나던 고운 흙 아래 묻힌 피와 눈물을 알아버렸다. 최신 유행하는 카페와 맛집, 호텔들이 즐비한 해안가 5km 안에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모여들었을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1948년부터 1954년까지 7년간 약 3만 명의 무고한 목숨이 희생되었던 비극을 이제야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왜 몰랐을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두 사람 모두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치 연인들이 짧은 이별을 미루기 위해 우회로를 택하듯 계속해서 지하철역 반대 방향으로 걸으며, 모퉁이를 돌 때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듯 펼쳐지는 고요한 횡단보도를 건너며 나는 기다렸다. 침묵을 깨고 인선이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쓴 작가인 경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인 인선과 각별한 사이다. 제주에 사는 인선이 통나무 작업을 하다가 두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찾아간다. 그리곤 인선의 부탁으로 제주 중간산 지역으로 가게 된다. 죽고 싶어 하던 경하가 인선이 사랑하는 새를 살리기 위해 눈보라를 뚫고 달려간다. 제주 중간산 지역은 4.3 사건 당시 무장대가 숨어 있던 지역으로 군경이 주민들을 해안가로 강제 소환하거나 학살했던 곳이다.
경하가 혹독한 눈보라와 고통을 겪으며 인선의 집을 찾아갔지만 새는 이미 죽어있었다. 이제는 경하의 생사마저도 알 수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 어딘가에 있는 경하는 환영일지 모를 집에 돌아온 인선을 만난다. 둘은 촛불을 켜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죽음과 생존, 상실과 기억을 나눈다. 인선은 경하를 데리고 ‘우리들의 나무를 심을 땅’을 보여주러 간다. 인선은 그들의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작별하지 않는다’의 제목처럼 기억을 지키고 이별을 짓지 않을 의지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그리고 경하는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을 만나 4.3 사건과 관련된 증언도 듣게 된다. 정심은 4.3 사건의 생존자로 어린 시절 겪었던 끔찍한 경험으로 평생 깊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던 인물이다. 그녀는 실종된 오빠를 평생 찾아다니지만, 오빠의 유해를 찾지 못하고 제대로 작별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정심은 사는 내내 이별을 고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을 지켰다.
책을 읽고 한강 작가의 이야기가 궁금해져 영상 자료를 찾아보았다. 한강 작가는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인간성의 바다를 내려가서 촛불을 밝히는’ 내용이라고 밝혔다. 이별을 고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포기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아름다운 문장 속 숨겨진 은유를 찾는 일이 숨은 그림 찾기 같았는데 작품 설명마저도 계속 생각하도록 만드는 질문 같았다.
인간성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무엇일까. 작가가 말한 인간성은 인간답게 사는 것, 즉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공감하고 기억하며 애도와 사랑, 존엄을 끝까지 지켜가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경하와 인선, 정심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려 애썼던 것처럼 말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는 데 7년이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어떤 학살의 이야기, 잊지 않아야 할 애도에 대한 이야기에서 출발했다는 이 소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썼다는 사실 또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인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삶으로 보여준 것 같다. 이 소설을 읽으며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완성을 향해 마음의 바다 밑까지 내려가서 건져 올리는 작가 정신과 오랜 시간이 걸려도 마침내 이루어내고야 마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배웠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건
죽기 전까지 이별을 짓지 않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