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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 Aug 13. 2023

그 병원 복도에서 본 것

“그냥 읍에 가 마치면 되는디 진주께 더 좋은지 알고 저거 업고 버스 타고 맨 진주를 왔다갔다했다 아이가.” 저의 주 양육자였던 할머니가 지금도 저나 엄마에게 무시로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할 때는 팔을 딱 뻗고 마치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 마냥 이쪽저쪽을 찔러야 합니다. 버스로 40분 거리인 남해읍을 과감히 등지고 그의 곱절인 1시간 반 거리의 진주를 선택한 것이 ‘애지중지’의 증표라 강조하는 셈이죠. 맞습니다. 1년에 한두 번도 아니고 신생아 때부터 어린이로 클 때까지 결핵, 파상풍, 홍역, 볼거리, 풍진, 수두, 독감 등 필수예방접종 항목이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파상풍은 5번이나 맞혀야 한다고요.


50살에 시작한 황혼 육아에 제일 고역스러운 건 뭐였을까 상상하면 아무래도 아이가 아플 때였을 것 같습니다.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건 어찌저찌 넘길 수 있으나 아픈 건 육아 경력자라 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었을 테죠. 남해군 설천면 노량마을, 이 촌동네에 의료시설이란 보건소 하나, 약국 하나가 다인데 주인장 모두 그때에도 60살을 넘긴 할머니들이었으니 제대로 된 진찰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분명했고요. 남해읍에는 5층짜리 병원도, 단층짜리 의원도 있습니다만 큰 병원은 장례식장이 더 바쁘고, 작은 의원은 안 되는 장사에 돌이라도 팔아먹겠다고 덤비니 믿을 구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자신의 믿음이 향하는 진주의 중규모 병원을 택했습니다. 저는 기억납니다. 진주는 남해읍보다 간판이 더 많고 사람도 더 많은 곳이었습니다. 북적이는 인파 속에 다리 아프다고 칭얼대면 할머니는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등을 내줬고, 병원에서 나오면 꼭 KFC 치킨이나 롯데리아 햄버거를 사줬습니다. 사방이 퍼석퍼석한 논과 밭인 촌동네에서 한나절 나가 만난 빨갛고 노란 포장지, 반짝이는 은박지, 그리고 마침내 입 한가득 물 수 있는 따듯하고 바삭한 튀김류는 신문물이 따로 없었습니다. 진주 약은 다를 거라는 할머니의 환상이 어쨌든 제게 보약이 된 건 분명합니다. 


어린이 때 몸을 못 가눌 만큼 아픈 적이 딱 한 번 있었습니다. 딱 이 맘 때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을 했고 봄바람이 불어들던 이 시기. 늘 그랬듯 2살 많은 아랫집 민지 언니와 길에서 노는데 재채기를 많이 했습니다. 하늘을 보고 꽃가루가 날리나 보다 했던 기억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열이 오르고 헉헉댄 것이 평소와 달랐죠. 피할 도리가 없다고 판단한 할머니는 아랫마을 남성횟집 삼촌 차를 대절해 4시간 거리인 부산대학교병원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의사는 뇌수막염이 의심된다는 진찰과 함께 척수를 뽑아야겠다는 계획을 통보했고요. 8살밖에 안 된 손녀 허리춤을 까고 이따시만 한 바늘을 꽂아 뭘 뺀다는데 할머니에게는 기함할 일이죠. 시술을 받으러 이동할 때였을까요. 움직이는 침상에 누워 옆을 보는데, 침대 손잡이 사이로 복도가 보이는데, 그곳에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마치 빨랫줄에 걸린 채 오는 비를 홀딱 맞아버린 빨래처럼 축 늘어진 모습으로요. 접혀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 순간, 나 어디 가는데 안 오네 서운하네,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내가 아프니까 할머니도 아픈갑다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그 병원 복도에서 본 건 평생을 흥청망청 써도 남을 수 있는 크기의 사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진찰 결과 뇌수막염은 아니었고 일주일 입원으로 끝났습니다. 친언니가 병문안을 와 주고 간 꾸러기수비대 그림카드가 영광스럽게 한 줌 남았고요.


지금은 잘 아프지 않습니다. 간간히 찾아오는 비염 때문에 가는 이비인후과를 제외하고는 병원을 찾는 일이 드뭅니다. 그때보다 네 곱절은 더 산 지금까지 깁스는 물론이고 입원 경험도 없습니다. 글 쓰며 생각한 건데 이 운이 따른 건 그때 할머니가 저 몰래 저를 지키는 약을 발라놓은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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