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하순이 되자 마트의 신선야채 코너 앞쪽으로 마늘쫑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노랑을 얼핏 머금은 연두색의 길쭉하고 매끈한 다발이 건강해보이기도 한다, 라고 생각할 찰나 어느 기억이 번뜩 일어난다. 아씨 왜 창피한 거야, 하고 이내 마늘쫑을 노려본다.
11살 즈음 있었던 일이다. 내 학교는 남해군 설천면 설천초등학교 덕신분교. 그 전년도부터인가, 학생 수가 적어 ‘초등학교’란 이름도 떼이고 ‘분교’로 쪼그라든 처지의 작은 터였다. 3개 마을의 8세부터 13세까지 어린이를 다 모아도 50여 명이 되지 않던 곳. 남해 이름값이라도 할라치면 바다라도 끼고 있어야 했을 텐데 아쉽게도 우리 학교는 언덕배기에 둘러싸여 양 옆, 앞으로 논만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경상남도교육청 소속 초등학교 선생님들 사이에서 우리 학교가 기피 대상이란 소문이 학생들 귀에도 돌았다. 여기로 발령나는 건 진짜 똥 밟는 꼴이라 했다. 그래서였을까, 학년이 오를수록 전근 온 선생님의 표정과 말투는 하나 같이 무심하고 또 무심했다.
어느 5월 종례 시간, 담임 선생님이 내일 선물 하나씩 챙겨오라고 툭 말했다. 자매결연학교에 가서 1박 2일 동안 함께 지낼 친구를 만날 건데 고학년씩이나 되서 그 정도 예의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뉘앙스였다. 자매결연학교는 부산 부자들만 산다는 해운대에 있는 해강초등학교. 갑작스럽게 떨어진 숙제는 1시간이란 가뜩이나 긴 하교길을 더 오래 끌게 했다. 물 댄 논 위의 소금쟁이나 개구리도 다 재미 없었다. 소리 나고 반짝거리는 필통이나 장난감, 그도 아니면 예쁜 공책이라도 사고 싶은데 그럴려면 읍에 가야 했다. 양육자인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 저녁에 나를 데리고 40분간 버스를 타고 읍에 갈 일은 만무하고, 우리 마을에 또래 친구도 없어 비빌 언덕도 없다. 스스로 애석했다. 그보다는 사실, 그렇게 공들여 준비해봤자 촌동네 초등학생이 신도시 초등학생의 눈높이를 맞출 수 없겠다는 계산이 먼저 선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저녁 내내 뾰루퉁한 낯을 하고 있었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역시나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당일, 아침 일찍 학교에 모여 대절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달려 자매결연학교에 도착했고 선생님들은 자기소개, 훈화 말씀, 짝지 매칭 등을 속전속결로 진행한 다음 바로 선물 교환식을 선포했다. 얼떨결에 ‘자매’ 맺어진 친구 집에서 한 밤 자는 것이 프로그램의 취지라 빠른 하교가 필요한 상황. 후후…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준비했을까나. 밤새 아린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 자리까지 가게 만든 그것은 바로 바로… 오늘 아침에 딴 마늘쫑, 11살이라도 껴 앉기 쉽지 않을 정도로 대따 푸짐한 마늘쫑.
아니, 근데 그게 화근일줄이야. 이 황금 보자기에 싸인 마늘쫑을 내 자매님이 몰라보는 것이다! 반면, 갸웃거리는 눈망울로 자매님이 꺼낸 어여쁜 분홍 머리삔을 나는 단박에 알아 보았다.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내 마늘쫑 보따리는 선물이 아니라 뒤로 감춰야 할 짐이 되었고 누구도 게임이라 말하지 않은 게임에서 그냥 참패해버렸다. 나는 보자기 매듭을 뚫고 튀어나온 저 마늘쫑 대가리를 숨기고 싶었다. 남해에서 유명한 거라고 우물쭈물 설명했지만 자매님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 그 허탈함이란.
나는 1박 2일 내내 시무룩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늘쫑과 머리삔이 낳은 대립구도는 논밭 위에 달랑 있는 2층짜리 분교와 높다란 건물들로 둘러 쌓인 4-5층짜리 학교로, 책상 6개가 고작인 교실과 20-30명이 겹겹이 줄 지어 앉은 교실로, 하교 후 가는 곳이 또랑뿐인 어린이와 아파트 상가의 문구점, 오락실, 분식집을 선택해 가는 어린이 구도로 확장됐다. 11살 어린이가 학교에서 겪기에는 처량한 현실이었다. 미리 선물을 준비하라고 말하지 않고, 애들 인사만 시키고 사라지고, 이런 교류가 갖는 의미도 들려주지 않은 담임 선생님을 비롯한 자매결연학교란 프로그램 자체가 싫었다. 자매결연학교를 이럴려고 하나. 시골에 있는 학교도 좋다고, 끝내준다고 포장할 거면 걔들은 왜 우리 학교 안 왔나!
그 마늘쫑과 머리삔의 만남을 내 두고 두고 못 잊는다. 봐라, 그 나이보다 세 곱절은 더 산 지금도 그때 느낀 초라한 심정이 마늘쫑 앞에만 서면 불쑥불쑥 나온다. 그 마늘쫑이 어떤 마늘쫑인데. 서늘한 아침 공기 사이로 품 넓은 브래지어 하나에 고쟁이 바지만 걸치고 푸른 밭을 헤집던 할머니 등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할머니는 부산 가서 나 기죽지 말라고 진심을 담아 수확했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보자기를 뺏어와 내가 요리해 먹고 싶은 심정이다. 그 마늘쫑은 그렇게 대우 받을 마늘쫑이 아니었다.
이건 모두 지역 간의 사회 문화적 격차와 그에 따른 인식 차이 등을 미리 고지하고 또 해설하지 않은 선생님들 탓이다. 그들이 내가 느껴야 할 남해 마늘쫑의 아삭함과 달큰함, 고향의 운치와 어린이의 동심을 다 배려놨다. 짜증나니까 오늘은 마늘쫑 쫑쫑 조사서 고추장 팍 퍼 넣고 달달 볶아 버려야겠다. 내 마늘쫑의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