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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 Sep 17. 2023

핑계는 이제 됐습니다

1999년 3월 3일

'작은 나'의 일기장



2023년 9월 17일

'큰 나'의 일기장


언제부터인지 모를 일이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는 듯 자연스럽다. 남들 재미있고 멋있어 보이는 생활 방식이나 습관을 당장 내일이라도 할 수 있는 마냥 선언하고 보는 일. 그리고 1차 시도에 (당연히) 실패하고 마치 한 번도 탐한 적 없었다는 듯 잊어버리는 일. 하, 내가 왜 그런 다짐을 했지? 나는 어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는가? 하는 후회 또는 반성, 또는 절망이나 좌절도 없다. 히죽거리다가 다른 목표를 찾아 눈을 돌리기 바쁘다.


2023년에도 다짐이 어마어마했다. 이만하면 입버릇이다 싶은 것이 빼곡하다. 의, 식, 주 카테고리도 다양하지. 현실 자각 겸 적어보자. ‘의’ 측면에서 먼저 볼까. 뿌리 없이 홀로 이곳저곳 흩날려 다니는 프리랜서여도 잘 먹고 잘 산다는 일종의 자존심과 직결된 사안들이었다. 외부 미팅 시 단정한 모습을 신경 써서 갖추기. 예를 들어 반팔 티 대신 와이셔츠를 입고, 운동화 대신 구두나 단화를 신기. 파운데이션이나 립스틱 정도는 바르기. 머리도 (잘 못하지만 그래도 옆머리 정도는) 드라이하기. 양말은 목 늘어난 것이나 구멍 난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버리거나 수선하기. 드라이클리닝 옷은 때마다 세탁소에 맡기기. 집에 돌아오면 먼저 샤워하고 위아래 맞춘 잠옷으로 갈아입기. ‘식’ 측면은 정성껏 밥을 짓고 차려 먹기가 단연 일등이다. 레시피 책만 2-3권은 샀다. 1주일에 3일 채식하기. 외식과 배달은 1달에 3번으로 줄이기. 냉장고 파먹기를 일상처럼 하기. 2주일에 1번은 냉장고 청소해 썩거나 유통기한 지난 것들을 솎아내기 등이 있었다. ‘주’ 측면에는 이상향이 완전 담뿍 녹아있다. 새벽 5시 미라클 모닝, 하루에 1시간 책 읽기, 정돈된 생활을 위해 안 쓰는 것 매일 3개 버리기. 마찬가지로 배출 또는 중고거래 부지런히 하기. 퇴근할 때 책상 깨끗하게 치우기. 일회용품 쓰지 않기, 매일 밤 일기 쓰기. 또 다짐에 빠지면 아쉬운 플러스알파, 취미 버전도 있다. 피아노 배우기, 서예 배우기, 영어 배우기, 매일 달리기 등등. 정돈되지 않는 일상을 한심하게 느끼면서 개선할 노력은 하지 않고 모두 새 다짐으로 덮으려는 안일한 전략. 다짐은 더 큰 선심이란 나를 위한 눈속임. 브런치 쓰기도 마찬가지다. 일주일에 한번 글쓰기를 지키기가 왜 이리 어렵나. 저때는 이렇고 이때는 이런 사정이 왜 나에게만 있나. 매일 매일 마감에 쫄리며 산다는 핑계로 스스로에게 한없이 너그럽다.


그러나 올 여름 끝 무렵 느낀 게 하나 있다. 다른 말일 수도 있는데 무엇이냐면 장비(도구)는 결국 도와줄 뿐이지, 일을 해 주지는 않는다고. 프리랜서로 살다 보니 여러 일을 동시에 하게 되는데 일정 관리가 영 버거운 게 화근이었다. 그래서 올해 상반기 동안 유행한다는 플래너는 한 번 쯤 다 써본 것 같다. 에버노트, 노션은 진즉에 판결을 내렸고, 먼데이, 스윗, 몰스킨, 굿노트 유료 노트 등등에 카드를 긁었다. 근데 그게 아주 잠깐 “오~”하는 순간은 줄지언정 끝까지 “아~”하게 하는 건 결국 ‘나’였다. 내가 빠지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비싼 것을 쓰든 무료를 쓰든 스스로 일을 처리하는 기준(또는 시스템)이 먼저다. 그것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이 말은 돈값을 다 못했다는 자백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7,000원짜리 스누피 스터디 플래너에 수기로 기록 중이다. 꾸준히 관리하는 연습 중이다. 생활도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살고 싶은 데로 살기 위해서는 다짐이 아니라 노력이 필요하다. 당장은 하기 싫고 피하고 싶은 일을 그래도 해보고 조금 더 익숙해지려는 공을 들여야 함을 인정하자. 솔직히 더 좋기로 따지면 다짐하는 설렘보다 끝에서 얻는 기쁨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내 워너비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새기자. “끝까지 하면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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