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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L POSTINO Apr 06. 2020

[감정에 대해]  혐오 감정과 인천 퀴어 문화 축제

2019 인천 퀴어 문화 축제



나는 작년 여름 즈음에 인천 퀴어 문화 축제에 가본 적이 있다. 들렀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나는 당시에 인천에 있다가 서울을 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려면 부평역을 경유해야 했는데, 부평역에서 마침 인천 퀴어 문화 축제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본 광경은 실로 놀라웠다. 퀴어 문화 축제도 놀라웠지만 그보다는 그것에 격렬히 집단적 혐오를 분출해내고 있는 반대 집회의 모습이 역겨울 정도로 놀라웠다. 그야말로 혐오가 만연한 사회다. 혐오는 분명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감정이다. 혹자는 현대 사회를 혐오 사회로 칭한다. 혐오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혐오란 무엇인가?


혐오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혐오는 기본적으로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이다. 하지만 특정한 감정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여러 감정이 뒤섞여서 작용하고 또 발현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혐오와 관련된 경멸, 모멸, 메스꺼움, 역겨움, 증오, 두려움, 공포, 불안, 분노 등의 감정, 더 나아가는 혐오로 인한 증상들을 포함하여 ‘혐오군 감정’이라 칭함이 마땅해 보인다.


혐오는 단순한 ‘싫음’의 감정과 구별된다. 혐오 주체에게 혐오 대상은 자신을 오염시킬지도 모르는 위험한 무언가로 인지된다. 그리고 그 대상은 음식물이나(다윈은 혐오의 뿌리를 ‘맛에 대한 불쾌함’에서 찾았다) 사물을 넘어 인간까지 확장된다. 따라서 혐오 주체는 그 대상을 궁극적으로는 제거하려고까지 한다.


사라 아메드는 혐오와 권력의 문제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에 대해 “한 대상의 신체에 대해 특정한 기호(sign)가 끈적끈적하게 접착된” 상황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기호는 신체의 특성을 규정한다. 이를테면 어떤 대상을 ‘혐오스럽다’고 호명하는 것은 언어수행적이다. 이는 이전의 관습이나 규범에 의존하지만 그 효과는 현재진행형으로 작용한다. ‘혐오스럽다’는 호명은 ‘역하고 나쁘고 야만스럽다’는 혐오의 기호를 어떤 대상에 부착시키는 수행적 효과를 발생시킨다.

예를 들어, 이런 과정을 통해 모든 동성애자는 에이즈 보균자이나, 에이즈를 확산시킬 위험을 가지고 있는 대상으로 간주된다. 아메드는 이를 인지의 경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지의 경제는 대상의 다양한 속성을 단순 명료한 속성으로 환원시켜 행위반응의 효율성을 추구하려는 정신적 과정의 산물이다.


혐오, 혐오군 감정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살펴보았다. 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혐오는 타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으로서 타자의 ‘이질성’이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오염시킨다는 인지적 판단(혹은 직관적 판단)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지의 경제원리에 따라 이들을 제거하려는 의도성을 갖는 감정이다. 혐오는 종종 그 대상을 유기체로 인지한다. 혐오대상은 무기질이 아니라 스스로 복제하고 번식하는 유기물이기에 그것이 ‘정상적인’ 우리에게 침투하여 우리를 오염시키며 마침내는 파멸시킬 위험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인지는 혐오 주체로 하여금 더욱 격렬하게 그 대상을 제거하려는 적대감을 갖도록 만든다.



무엇이 그들을 '정의의 사도'로 만드는가?


다시 퀴어 문화 축제로 돌아가보자. 축제에는 많은 퀴어들, 혹은 그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숙연하게 진지한 담론을 나눌 때도 있었으나 대체로는 그것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른 여느 축제와 다를 바 없는, 그들을 위한 ‘축제’였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흔히 대상화하는 것처럼, ‘억압된 피해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실제로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여러 특성들이 겹쳐진 존재라면, 그들에게는 퀴어 또한 하나의 특성이리라. 우리는 종종 그들의 한 가지 특성을 확대하며 그들을 손쉽게 규정지어버리곤 하지만.


동성 결혼 반대 서명을 받고 있던 인천 기독교 연합 회원들

이런 대상화되지 않은 자유로운 퀴어 문화 축제의 모습보다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더 큰 규모로 이루어진 퀴어 문화 축제 반대 집회였다. 그들은 대형 선전차까지 기용하며, 격렬하게 퀴어 축제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조야한 근거들을 들고 자신들의 정당함과 저들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있었다. 자신들에게는 동성애를 ‘비난’할(비판이 아니라 정확히 비난이라고 하였다) 자유가 있다. 동성애자들이 AIDS와 음란한 풍속을 확산시켜 종래에는 사회 전체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진정으로 근거라고 할만한 것은 없었다. 집단적 광기에 사로잡힌 주장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동성애를 비난하고 싶다, (제대로 확인해 본 적 없거나, 조잡한 유사과학이나 통계자료의 무비판적 수용에 입각한 채) 그들은 에이즈를 옮길 것이다, 결혼은 ‘원래’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다, 와 같은 주장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주말 휴가를 포기하면서까지 누군가를 혐오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한 부모와 자식들이 함께 구호를 외치던 장면이었다. 늦여름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군중들 속에서, 아이들은 모자를 쓴 채 땀을 흘려가며 열렬하게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아이들은 조금은 신나 보이기까지 했다. 선창자가 “동성애!”라는 구호를 외치자, 아이들은 변성기도 채 오지 않은 목소리로 “물러가라!”라고 외치고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혐오 현장의 모습은 앞서 밝힌 논의와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혐오의 감정은 세대를 이어 무비판적으로 그리고 무분별하게 전승되고 있었다.


무엇이 그들을 ‘정의의 사도’로 만들었는가? 혐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는 듯 당당하게 행동했다. 자기 자손들의 국가의 미래를 위해, 혹은 자신들의 신을 위해 소중한 여가시간을 스스로 반납하고 소명을 다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집단적 무사유 및 도취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이러한 젠더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고 전파시킨 주체들이 혐오스러웠다. 무비판적으로 자신들이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며 반대 논거를 살펴보지도 않은 사람들, 혹은 어느 정도 자신들이 잘못되었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외면하거나 의도적으로 은폐하고자 했던 사람들. 이를 통해 자신의 특수한 이익을 사회의 이익으로 포장하려던 사람들.


이 모두가 혐오스러웠다.



혐오를 혐오하는 혐오


그러자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혐오를 혐오하는 혐오로서 이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한가?’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치와 같은 극우세력에 대한 혐오와 역겨움을 통해 인간 생명의 존엄과 인권을 체감하듯 혐오와 메스꺼움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혐오만이 너무 가득하며,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의 기제로서 작용할 뿐이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혐오, 그 혐오를 혐오하는 혐오. 다시 그들에 대한 혐오… 마치 엘리베이터 속 마주 본 거울과 같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선 혐오의 대상은 그 혐오들이 어디로 치닫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는 거울들을 깨뜨릴 힘도 의지도 없어 보이는 혐오의 세상 속에서 오늘의 삶을 살아내야 할 뿐이다.



내가 퀴어 문화 축제를 다녀와서 찍은 사진은 채 스무 장도 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진들 중 퀴어 문화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습은 단 한 장도 없다. 나는 처음에 축제에 도착했을 때, 자신들의 실존과 정당성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퀴어 분들, 그리고 그 분들을 지지하는 많은 비非퀴어들의 모습에 감동하였고 이내 자연스레 카메라를 들었다. 그러자 스태프분들께서 내게 조심스레 스태프증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셨다. 그러고 나서 여기에 참여하고 계신 분들은 개인 정보나 얼굴이 유출될 경우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될 수 있기에 사진 촬영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나는 여기에서 뼈저리게 반성하였다. 그들이 퀴어로서 살아가고 있는 삶의 감각이란 얼마나 위태롭고 두려운 것인지, 나는 차마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투쟁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몸부림이었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단 한 번도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기에.


참고

김왕배, 『감정과 사회』, 한울 아카데미, 2019, 286-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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