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문학은 손으로 쓰는 것이다. 이는 문학 작품이 작가의 완벽한 계획과 구성 속에서 조직되는 하나의 유기적 사실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문학 창작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는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이는 문학 작품은 작가가 만들어낸 하나의 ‘독자적 세계’임을 역설하는 말이다. 작가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그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혹은 적어도 제 의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작품으로 써내고는 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도 그런 작품이다.[1]
『노인과 바다』는 장자적 맥락에서 독해낼 수 있는 지점을 놀라울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헤밍웨이가 장자적 철학에 심취하여 이 글을 썼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실제로 그랬다고 하여도 그것은 작품을 독해해 내는데 크게 중요한 점이 아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작품은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이기에 작품 자체로서 읽혀야 하는 까닭이다.[2] 사족이 길었다. 작품으로 들어가겠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작품의 핵심적인 요소는 ‘노인’과 ‘바다’이다. 작품에 의하면 바다는 여러가지 맥락으로 읽힐 수 있다. 작품 내에서 바다가 어떤 식으로 그려지고 있는지 살펴보겠다.
노인을 비롯한 마을의 사람들은 바다를 “라 마르(31)”라는 스페인 말로 부른다. 스페인어는 무생물에도 성의 구별을 두는데, 바다의 여성형은 ‘라 마르(la mar)’이고 남성형은 ‘엘 마르(el mar)’이다. 이는 “이곳 사람들이 애정을 가지고 바다를 부를 때 사용하는 스페인 말이다. 물론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바다를 나쁘게 말할 때가 있지만, 그럴 때조차 바다를 언제나 여자인 것처럼” 부른다. 노인은 바다를 늘 여성으로 생각한다. 또한 바다가 “큰 은혜를 베풀어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한다고 말한다. 노인의 이러한 태도는 “젊은 어부들”의 그것과 대비된다. 그들은 바다를 ‘엘 마르’라고 남성형으로 부른다. 그들은 “낚싯줄에 찌 대신 부표”를 사용하며, 바다를 “경쟁자, 일터, 심지어 적대자”라고 인식한다.
바다를 자연 전체에 대한 비유로 확장시켜 이해한다면, 바다-자연에 대한 ‘엘 마르’로서의 이해는 적대적이다. 반면 ‘라 마르’로서의 이해는 우호적이다 못해, 바다-자연을 하나의 큰 생명으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자연에 대한 장자의 태도와 유사하다. 장자는 「逍遙遊」의 한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중에 떠 있는 아지랑이와 티끌은 살아 있는 생물들이 입김을 서로 내뿜는 데서 생겨나는 현상이다. (莊子, 29)
이는 장자의 자연관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장자에게 자연은 이는 단순히 자연을 물질적인 ‘환경’ 개념 이상이며, 노인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바다에 대한 태도는 장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또한 노인은 설사 “바다가 무섭게 굴거나 재앙을 끼치는 일이 있어도 그것은 바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장자적 삶의 태도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작품 속에서 바다는 만새기, 날치, 군함새, 청새치, 상어, 해파리, 바다거북 등이 살아 있는 삶의 터전이다. 바다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다. 지구 상의 생명은 바다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노인은 바다의 다른 생물들을 보며 “형제” 혹은 “친구”로서 인식한다. 또한 바다는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노인과의 싸움에서 죽은 상어는 “아주 천천히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동시에 바다는 아득한 미지의 영역이기도 하다. 바다는 “온갖 올가미나 덫이나 계책이 미치지 못하는 깊고 어두운 물 속”을 가진다. 인간은 감히 그 깊은 물 속을 헤아릴 길이 없다. 또한 바다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가지 못하는 그곳”을 가지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아득한 미지의 영역에서 모든 물상이 비롯되어 나고 지는 장[場]이 바다인 것이다. 이러한 바다의 모습은 『莊子』의 「應帝王」에 수록된 혼돈에 대한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남해의 왕은 숙이고 북해의 왕은 홀이며 중앙의 왕은 혼돈이라. 숙과 홀은 떄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이 잘 대접하였다. 홀은 때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이 잘 대접하였다. 숙과 홀이 혼돈의 덕에 보답하고자 상의하여 말하되, “사람들은 얼굴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숨 쉬는데, 혼돈만이 구멍이 없으니 구멍을 뚫어 주도록 하자.” 그리하여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었더니 칠 일째 혼돈이 죽고 말았다. (『莊子』, 343)
남쪽은 생명의 상징이고 북쪽은 죽음의 상징이다. 중앙의 왕은 혼돈이다. 우리는 보통 공간의 가운데를 중앙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여기서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면서 스스로는 자신의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바로 중앙이다. 하늘과 땅 사이의 텅 빈 공간은 꼴, 모양, 모습, 혹은 정체성을 가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 허공에서 만물이 솟아나온다. 만물이 태어났다 사라지는 일련의 과정의 반복이 혼돈인 것이다. 그것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규정할 수 없는 어떤 근원적 상태이다. 이것 저것과 같은 개념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인 것이다.
노인이 탄 배는 “여기저기 밀가루 부대 조각으로 기워져 있어서 돛대를 높이 펼쳐 올리면 마치 영원한 패배를 상징하는 깃발처럼(10)” 보이는 돛을 단 초라한 모습이다. 노인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이다. 노인은 또한 “하도 여러 번 기워서 마치 돛(19)”과 같은 셔츠를 입고 있다. 노인의 외양도 별 다를 바가 없는 상태이다.
노인은 깡마르고 여윈 데다 목덜미에는 주름이 깊게 잡혀 있었다. … 그의 두 뺨에는 양성 피부암의 갈색 반점들이 나 있었다. … 두 손에는 … 상처가 깊게 파여 있었다. (10)
그러나 노인의 두 눈만은 “바다와 똑같은” 빛깔을 띠며 “기운차고 지칠 줄” 모른다. 게다가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어깨에는 “이상하리만큼 힘이 흘러넘”치고, 목에도 “여전히 힘이 있”다. 노인의 배 또한 고기와의 싸움에서 파손되지 않고 돌아올 만큼 견고하다. 배와 노인은 마치 서로가 서로의 분신인 것처럼 보인다.
소설은 노인의 행적을 따라 전개된다. 본 글도 그 행적에 발맞추려고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행적보다는 노인이 ‘처하게 되는’ 상황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나,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논의하도록 하겠다.
노인은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나간다. 그런데 “뭔가 거세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육중한(44)” 무게감을 느낀다. 지금까지 마주친 고기 중 가장 큰 고기가 미끼를 문 것이다. 고기는 미끼를 문 채로 바다를 헤엄쳐가기 시작한다. 고기는 노인의 배를 끌고 가기 시작한 것이다. 노인은 고기가 자신의 배를 끌어가도록 하면서도, 줄어 끊어져 고기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한다. 때로는 줄을 풀었다가 당겼다가 하면서 끊임없이 고기를 좇는다. 노인은 “모든 사람이 다다르지 못하는 그곳(51)”,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가지 못하는 그곳(51)”까지 고기를 쫓아가 찾아내고자 한다.
노인을 이끄는 이 거대한 고기의 존재는 운명의 메타포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이끄는 거대한 힘으로서의 운명. 우리는 운명에 끌려다니지만, 그럼에도 그 줄을 바짝 당기기도, 때로는 헐겁게 풀어주면서 따라간다. 고기를 운명의 메타포로 읽어낼 때, 고기를 좇는 노인은 자신을 끌고 가는 운명을 끝내 잡고 말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읽어낼 수 있게 된다. 노인의 고기에 대한 투쟁은 곧 운명에 체념하지 않고 그것을 쟁취하려는 실존적 투쟁이요, 말 그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가지 못하는 그곳”을 향한 서사이다.
노인은 고기를 존경한다. 고기가 “고결”하고 “아름다우”며 “두려움을 모르는” 까닭이다. 보다 정확히는 노인이 ‘고기-(자신의) 운명’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까닭이다. 노인은 운명의 거대함 앞에 경외감을 표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기를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운명의 거대함을 보면서도 그 운명에 대적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이다. 이러한 노인의 의지는 다음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고기야, 이 녀석 고기야, 넌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야. 너도 나를 죽이겠단 말이냐?” (중략) 고기야, 네놈이 지금 나를 죽이고 있구나,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네게도 그럴 권리는 있지. 한데 이 형제야. 난 지금껏 너보다 크고, 너보다 아름답고, 또 너보다 침착하고 고결한 놈은 보지 못했구나. 자, 그럼 이리 와서 나를 죽여 보려무나. 누가 누구를 죽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93-94)
한편 노인은 자신과 형제 사이인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고기와 그의 두 손이다. 앞서 고기는 노인의 운명이라고 말했다. 노인의 두 손 중 오른손은 운명에 대적하는 노인의 강인한 모습이다. 노인의 오른손은 고기와의 투쟁에 있어 마지막까지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반면 노인의 왼손은 운명에 대적하는 노인의 나약한 모습이다. 왼손은 제 몫을 다 하려 하지만, 고기를 좇던 과정에서 쥐가 나기도 한다.[3]
그는 쥐가 난 왼손을 잠시 창피해하거나 양손잡이로 태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펴려고 하지는 않으며, 왼손이 제 나름의 역할을 잘 해냈고, 쥐가 곧 풀려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의 논의를 고려하여 노인의 고기잡이가 가진 의미를 짐작해볼 수 있으리라. 즉, 바다로 상징되는 혼돈 위에서, 1)운명과 그 운명을 대하는 2)강인함 그리고 3)나약함이 ‘운명에 마주한 인간’이라는 하나의 실존을 구성한다는 점까지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노인은 결국 고기를 잡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광경은 아름답다 못해 경이롭게 묘사된다.
죽음을 맞은 고기는 갑자기 생기를 되찾은 듯이 수면 위에 길쭉하고 널찍한 몸뚱이와 함께 그 위력과 아름다움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배 안에 있는 노인보다도 더 높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뒤 고기가 첨벙하고 물속에 떨어지즌 바람에 물보라가 일어 노인과 배 위에 왈칵 쏟아져 내렸다. (95-96)
삶과 죽음 사이에 위치한 고기-운명이 혼돈의 바다 위로 언뜻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어떠한 경지가 노인에게 얼비친 것이다. 노인이 자신의 운명에 끌려다니지 않고 끝내 그것을 붙잡았을 때 일시적으로 볼 수 있던 경지가. 그러나 노인의 목격은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다.
고기와의 싸움이 끝날 무렵 몹시 피로하고 의식이 아물거렸을 때, 그는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고기가 물 위로 뛰어올라 물속으로 떨어지기 직전 공중에 움직이지 않고 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그는 무슨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거라 생각했고, 도저히 그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은 잘 보이지만 그때는 눈도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100, 밑줄은 인용자가 침.)
상식적으로 접근해 볼 때 눈이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일까? 또한 지금은 외려 그것이 잘 보인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의 ‘목격’이 지각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의 이 부분은 『莊子』의 「養生主」에 수록된 포정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일화 속 포정은 소를 잡는 기술이 상당한 경지에 닿아있는 사람이다. 본문을 참고해보자.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道인데, 이것은 기술에서 더 나아간 것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해부하던 때에는 눈에 비치는 것이 소 아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뒤에는 온전한 소는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神을 통해 소를 대하고,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의 지각 능력이 활동을 멈추고, 대신 신묘한 작용이 움직이면 자연의 결을 따라 커다란 틈새를 치며, 커다란 공간에서 칼을 움직이되 본시 그러한 바를 따를 뿐인지라, 經絡과 肯綮이 (칼의 움직임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데 하물며 큰 뼈이겠습니까?” (『莊子』, 133, 괄호는 역자가 침, 밑줄은 인용자가 침)
우리가 사물을 대할 때 사용하는 다섯개의 감각기관, 오감을 전오식이라고 한다. 우리는 보통 전오식을 사용하여 대상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가 가진 이러한 인식들은 그에 선행하는 우리의 편견, 기질 등에 근거하여 받아들여진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가 인식하고 판단되는 것은 우리의 의식에 의해 재구성된다. 그리고 그 재구성된 상이 우리의 마음이 비춰질 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가 보고 있는 대상과 동일시하게 된다. 거기에서 우리가 가지는 무궁무진한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위의 일화 속의 포정은 자신의 눈이 아닌, 神으로 소를 대한다고 이야기하였다. 여기서의 神은 정신 혹은 직관으로 보면 될 것이다. 즉 포정은 자신의 인식과정을 거치지 않고 소를 대하는 것이다. 道 또한 마찬가지로 지각으로 경험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또한 道는 말로써 설명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도연명의 〈음주이십수飮酒二十首〉 중 제5수가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 사는 마을에 초가집 얽었지만 / 수레와 말의 시끄러운 소리 없지요. /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그럴 수 있소? / 마음은 멀고 땅은 치우쳐 있기 때문이라오. / 동쪽 울 밑에서 국화 따다가 /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니다. / 산 기운은 저물녘이라 아름답고 / 날새들은 서로 함께 돌아오네요. / 이 가운데 참된 뜻 들어있나니 / 분별하고 싶지만 이미 말을 잊었다오. (陶淵明, 『도연명집』, 밑줄은 인용자가 침.)
시인은 황혼 무렵에 새들이 하늘을 날아 제 보금자리로 찾아가는 모습을 보고 이것을 진리의 현전이라고 느끼며 시어로 적고자 한다. 그러나 이미 그에 상응하는 시어를 잊어버리게 된다. 우리도 일상에서 어떠한 존재, 진실의 본질을 말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시인의 경험 또한 우리의 그것과 유사했으리라. 하지만 시인은 오히려 그 말을 잊었다고 말함으로써 그 진리의 순간을 이 시 속에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보자. 노인은 그 광경을 눈으로 목격한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말로 표현하려 하면,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형태로 받아들이려고 하면 필시 문제가 생긴다. 그러한 시도는 道의 본질을 왜곡하게 되며, 설사 받아들여지더라도 그것은 이미 죽은 道일 수밖에 없다. 노인이 “겨우 앞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96)”는 이미 “고기가 은빛 배때기를 드러내고 벌렁 자빠진(96)” 모습만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정작 그렇게 힘겹게도 투쟁하여 운명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것은 곧 죽은 운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노인과 그의 운명은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가?
노인은 고기를 잡고 마을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투쟁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사로잡으려는 시도가 실패했음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노인은 배에 고기를 묶어둔다. 그런데 고기의 피 냄새를 맡고 쫓아온 상어 떼가 고기를 습격하기 시작한다. 노인은 상어 떼에 맞서 다시금 불굴의 의지로 맞서 싸운다. 노인은 말한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야(104).”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어(104).” 그러나 상어 떼는 피냄새를 맡고 끊임없이 다가온다. 노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노인의 무기는 망가지고 상어떼의 습격을 멈출 수 없게 된다. 노인은 고기의 훼손을 보며 가슴아파한다. 노인은 “몸뚱이가 뜯겨 성하지 않게 되어버린 고기를 이제 더 이상 바라보고 싶지(104)” 않아 하며, “고기가 습격을 받았을 때 마치 자신이 습격받는 듯한 느낌이(104)” 들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훼손된 우리의 운명을 바라보는 모습과 겹쳐진다. 우리는 우리 운명의 훼손을 마치 자신의 훼손인 양 고통스러워한다. 이 고통의 해답은 어디에 있는가?
노인이 고기를 잡고 고기를 배에 단단히 붙들어 맨 후 했던 말들에 주목해보자.
고기가 나를 데려가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고기를 데려가고 있는 건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고기를 뒤에 두고 끌고 가고 있는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고기 놈이 모든 위엄을 잃어버린 채 지금 배 안에 있다고 해도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지. 하지만 고기와 배는 지금 서로 묶인 채 나란히 항해하는 중이야. 만약 고기 놈이 나를 데리고 가는 거라면 그렇게 하라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꾀가 있어 저놈보다 나은 것일 뿐 저놈은 내게 아무런 적의도 품고 있지 않았거든. (100, 밑줄은 인용자가 침.)
이 부분은 자뭇 흥미롭다. 노인이 고기-운명을 뒤에 두고 끌고 가는 경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또한 고기-운명이 모든 위엄을 잃고 노인의 배 안에 있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고기-운명과 배-노인이 서로 묶인 채 ‘나란히’ 항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운명이 노인을 끌어가거나, 노인이 운명을 붙잡아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노인과 운명은 동보적이다(즉, 함께 나아간다). 이는 노장사상에서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안시처순[安時處順]의 태도를 상기시킨다. 안시처순은 태어날 때는 태어날 때가 되어 편안히 태어나고 죽음에 있어서는 죽음에 순종하면서 저항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태도이다. 노장 사상에서 볼 때,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의 커다란 걸음 속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의 과정이다. 따라서 그 과정을 부정할 이유도, 부정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시간에 더불어 같이 흘러갈 수 있게 되고, 끝내 시간이 가진―모든 살아있는 것을 죽음으로 만드는―폭력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것이 도가 사상의 동보적 시간관이다.
노인은 상어 떼에 의한 고기의 훼손에 고통스러워하기도, 맞서 싸우기도 하지만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경지에 다다른다.
그는 부대를 어깨 위에 걸치고 배의 진로를 잡았다. 이제 배는 바다 위를 가볍게 미끄러지듯 달렸다. 그에게는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노인은 모든 것을 초월한 채 가능한 한 배를 요령 있게 다루어 무사히 항구에 도착할 수 있도록 몰았다. (중략) 한밤중에도 상어 떼가 고기 잔해에 덤벼들었다. 그러나 노인은 상어 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키 잡는 일에만 집중했다. 뱃전에 달린 무거운 짐이 없어진 배가 얼마나 가볍고도 순조롭게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지만 느낄 뿐이었다. (120-121, 밑줄은 인용자가 침.)
이는 소요유[逍遙遊]의 경지를 떠올리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그 자신에 대한 상, 즉 아상[我相]을 그 자신으로 알면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본질과는 다른 삶이기 마련이다. 장자는 인간의 본질을 자유로 본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 본질을 살아가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한다. 그들이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다른 누군가가 그들을 부자유하게 옥죄서가 아니다. 그들 자신이 스스로를 옥죄는 장본인인 까닭이다. 인간이 제 스스로가 만들어낸 아상,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규정에 종속되는 이상, 우주론적인 본질을 회복할 수 없다. 그래서 장자는 소요유의 경지를 역설한다. 소요유는 나의 그릇된 아상이 한없이 작아져, 결국 나를 잊고 우주론적인 존재로서의 나를 깨달았을 때 다다를 수 있는 경지이다. 그 경지에서 우리는 우리의 시공간을 자유로이 거닐게 된다. 초월의 경지이자 자유의 경지이다. “모든 것을 초월한 채”, 아상에서 비롯된 어떤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감정도” 없이 행하는 무위[無爲]의 상태에서, 말하자면 “뱃전에 달린 무거운 짐”이 없어진 상태에서 “배”는 얼마나 “가볍고도 순조롭게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달릴 수 있겠는가!
노인은 그렇게 돌아오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는다.
한데 너(노인 자신)를 이토록 녹초가 되게 만든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어. 다만 너는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121, 괄호는 인용자가 침.)
노인은 제 운명을 붙잡기 위해 멀고도 아득한 혼돈의 바다로 나왔지만, 결국 깨달은 점은 너무 멀리 왔다는 사실이다. 운명은 투쟁해서 사로잡거나 붙잡아 두기 위해 기를 써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동보적 태도로 천연히 나아가야 할 무언가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기에 마을을 떠난 먼 바다에서 에둘러 찾아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장자 사상이 추구하는 경지는 세속을 떠나서 ‘홀로’ 선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세속 속에서 더불어 살면서도 자신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망각하지 않는 경지이다. 즉 인간 세상을 ‘포함’하면서도 인간 세상을 ‘초월’하는 삶이다. 이른바 포월[包越]적 삶이다. 노인은 그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제 마을-삶으로 돌아온다. 해변에 놓인 속이 텅 빈 고기의 등뼈는 조류에 휩쓸려 다시 혼돈의 바다로 돌아가길 기다린다.
고기를 잡고나서 마을로 돌아오기까지를 묘사한 소설의 후반부에서, 비로소 운명에 맞서는 실존적 개인의 모습과 장자적 사유의 경지가 맞닿게 되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위대한 문학적 성취가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인과 바다』는 바다 위에서의 투쟁을 거쳐 결국 본래의 삶으로 돌아오게 되는 대장정이다. 노인의 모습은 성자의 그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운명으로서의 고기의 눈은 “행렬에 끼어 걸어가는 성자의 눈처럼 초연(98)”하다. 몰려드는 상어를 보며 노인은 “아(Ay)!”라고 외친다. 소설의 화자에 따르면 이 외침은 다른 어떤 말로도 옮길 수 없다. “손바닥을 뚫고 널빤지에 못이 박히는 것을 느낄 때 무의식적으로 지르는 그런 소리라고나 할(108)” 수 있을 그런 소리이다. 그런 고난을 거쳐 노인은 결국 마을에 도착한다. 그리고 노인은 녹초가 된 상태로 배에서 뺀 “돛대를 어깨 위에 걸머메고 언덕길을(122)” 오른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렇게 노인이 자신의 골고다 언덕을 올라 도착한 곳을 자신의 집이다. 노인은 “담요를 어깨와 등과 다리까지 덮고 두 팔을 쭉 뻗고 손바닥을 위로 펼친 채(123)” 잠이 든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 묘사는 성자와 같은 경지에 다다른 노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장소는 노인의 마을-집-삶이다.
집에 도착한 노인은 사자꿈을 꾸고 소설은 마무리된다. 소설 내에서 노인은 여러 번 사자꿈을 꾼다. 여기서의 사자는 사나운 포식자로서의 사자가 아니다. “사자들은 황혼 속에서 마치 새끼 고양이처럼 뛰어(27)”노는 사자이다. 또한 혼자가 아니라 여러 마리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자의 모습은 마을에서 노인을 잘 돌보아주는 소년 마놀린의 모습와 겹쳐진다.
그는 소년을 사랑하듯이 이 사자들을 사랑했다. (27)
노인은 바다에 홀로 있으면서 소년이 옆에 있었다면 좋았으리라 여러 번 되뇌인다. 사자-소년은 우리에게 연대와 조화의 가치를 떠올리게 한다. 그토록 먼 혼돈의 바다 위에서 실존적 개인으로서 자신의 운명과 홀로 투쟁했던 노인은, 자신의 운명과 동보적으로 나아가는 성인의 경지가 되어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다. 그가 얻은 깨달음은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놀아온 제 본래의 삶 속에서 노인은 연대와 조화의 가치를 꿈꾸며 소설은 마무리되는 것이다.
이처럼 실재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고대 중국의 사상과 현대 서구의 문학 작품에서 겹쳐지고 있음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독자로서 마음이 제법 흐뭇해짐을 느낀다.
[1]
본 글에서는 아래의 판본을 기준으로 한다. 가독성을 위해 해당 책에서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페이지만을 표시할 것임을 밝힌다.
헤밍웨이, 어니스트(Hemingway, Ernest). 2012. 『노인과 바다』 김욱동 역. 민음사.
[2]
작품의 특정 부분이 장자적으로 읽힐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정당한 분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이 장자의 이념을 잘 ‘구현’하고 있다는 식의 분석, 혹은 장자의 사상에 작품을 ‘대입’시켜 구조화하는 식의 분석은 유의하고자 한다. 문학 텍스트는 그 자체로서의 독자적인 지위를 인정받아야 한다.
[3]
노인은 쥐가 난 왼손을 보며 그것이 “특히 혼자 있을 때 그야말로 창피한 노릇(63)”이라고 생각한다. 창피함의 감정은 보통 다른 존재를 의식했을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혼자서’ 쥐가 나는 상황에 처하게 될 때 느끼게 될 감정은 창피함보다는 당혹감이리라. 이것은 그가 홀로 선 바다 위에서조차 타자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는 노인이 바다 위에서 마놀린을 끊임없이 찾고, 또 사자꿈을 반복해서 꾸는 이유이리라. 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절에서 좀 더 논의하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도연명(陶淵明). 2010. 『도연명집』 임동석 역. 동서문화사.
장자(莊子). 2001. 『莊子』1 安炳周·田好根 역. 傳統文化硏究會.
헤밍웨이, 어니스트(Hemingway, Ernest). 2012. 『노인과 바다』 김욱동 역.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