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 『광장』, 『태풍』
작가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명준과 『태풍』의 오토메나크는 시대의 이데올로기의 속에서 고통받는 지식인이다. 이들은 자신을 짓누르는 과거의 무게를 극복하고 자신이 주체로 설 자리를 찾기 위해 고뇌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녹록지 않다. 그 과거의 무게가 아주 무겁게 그들을 짓누르는데,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사용해야 할 그들의 사고 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에 젖어있는 까닭이다.
명준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어 고통스러워한다. 명준은 급기야 꿈에서 인민군으로서 제 친구 태식을 격렬히 고문하고 그의 아내이자 자신의 옛 애인이었던 윤애를 겁탈하며 자기를 확인하려고 하기도 한다.
“나에게 부탁이 없나?” “고문을 견딜 수 없어. 빨리 총살해주게.” “자네의 죽음을 아무도 몰라도 좋은가?” “자네 북으로 가더니 속물이 됐군. 난 괴로우니까 빨리 쉬고 싶을 뿐이야.” “지금 난 자네에게 우정이 없네. 자네가 괴로워할 때 나는 웃어야 하도록 돼 있다는 걸 지금 똑똑히 알겠군.” “자넨 그토록 악당이었나?” “나를 구속할 죄를 내 손으로 만들겠어. 자네 부인이 2층 내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그녀도 나의 새 탄생을 도와야 해.”[1] (『광장』, 177)
자신을 구속할 죄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겠다는 명준의 태도는, 선택의 책임을 오롯이 이데올로기의 탓으로 떠넘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과거의 결정이 그릇된 것일지라도 그마저 자신의 책임으로 끌어안으려는 주체로 거듭나고자 한다. 하지만 그 방법은 결국 과거의 이데올로기에 다시금 의탁하게 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그 양태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
『태풍』의 오토메나크는 나파유의 식민지 애로크 출신이면서도 친나파유주의자였던 과거를 돌이킬 수 없어 고뇌한다. 오토메나크는 나파유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파유의 주적이자 또다른 식민국인 니브리타를 선택해야 한다는 논리적 모순 속에서 고통스러워한다. [2]
이 큰 잘못. 이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것은 나파유와 싸우는 길이 된다. 어떻게? 나파유 군복을 입은 내가 나파유와 싸운다는 것은. 게릴라가 된다? 그 게릴라는 니브리타가 조종하고 있지 않은가? 니브리타. 머리에 피가 올랐다. 나파유와 싸우자면 니브리타의 편이 되어야 한다면 말도 안 된다. 아시아 공동체는 니브리타를 몰아내는 싸움인데, 애로크가 독립하자면 니브리타와 손을 잡아야 한다? 너무나 괴상한 결론에 오토메나크는 소름이 끼쳤다. (303-304)
친나파유주의로서의 과거를 이겨내려 하지만, 그의 사고는 ‘나파유의 아시아공동체 對 니브리타의 서구 제국주의’라는 주입된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그는 나파유 군인에게 주입된 죽음관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예견된 나파유의 패전에서 자신의 순사[殉死]로써의 죽음만을 바라본다.
(카르노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죽으려 하는가. (오토메나크) 그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 길밖에는 없습니다. (중략) (카르노스) 당신은 자기 교만함에 속고 있소. (490-491, 괄호는 인용자가 침.)
그랬던 명준과 오토메나크가 제 과거의 하중을 이겨내고 진정한 주체로 거듭날 가능성을 모색한다. 남한도 북한도 아닌, 나파유도 니브리타도 아닌, 제3의 중립국행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명준과 오토메나크의 중립국행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명준의 미래에는 과거 (은혜와의) 사랑을 실현할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았고, 오토메나크의 미래에는 과거 (아만다와의) 사랑을 실현할 가능성이 존재했다.[3] 바꾸어 말하면, 명준이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 극복해야 할 과거에는 사랑이 포함됐고, 오토메나크가 극복해야 할 과거에는 사랑이 포함되지 않았다
여기서 잠시 『광장』의 개작에 따른 명준의 중립국 결정과 자살이 가지는 의미 변화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광장』의 개작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변화는, 배 위에서 명준을 따라다니는 두 마리의 새 중 한 마리가 작은 것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즉 두 마리의 새가 상징하던 것이 윤애와 은혜에서, 은혜와 딸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개작 이전에 명준의 자살은 그가 중립국으로 가더라도 사랑이 포함된 그의 과거가 그를 따라올 것이라는 점에서 비롯된 선택이다. 즉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더라도 따라올 과거의 그림자를 이겨낼 수 없기에, ‘죽음’에서 주체의 자리를 마련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개작 이후에 명준의 자살이 의미하는 바는 ‘죽음’을 통해 사랑을 완성한 주체의 실현이다. 개작을 통해 명준은 좀 더 적극적인 주체가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새의 의미 변화가 명준의 자살에 대한 해석을 전적으로 뒤바꾸는가? 그것은 ‘딸’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에서 비롯된다. 딸의 존재는 명준의 과거가 가진 무게에 필연성을 부여한다. 열과 압력을 통해 고운 보석이 만들어지듯, 무거운 그의 과거는 아이라는 결실을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 변모한다. 또한 그 필연성은 미래를 살아가게 한다. 딸이라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새 삶이기도 하지만, 명준에게도 미래의 새 삶을 가능하게 하는 동인이 된다. 그런데 은혜와 그 딸의 죽음은 그러한 가능성의 좌절이다. 그에게는 더 이상 과거의 무게를 미래의 ‘삶’으로 끌고 갈 수 있게 하는 어떠한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자 그는 ‘삶’에서는 찾을 수 없는 사랑의 실현을 ‘죽음’에서 완성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사랑을 실천하는 적극적인 주체로 거듭나려 한다. 그 전까지 부채로서 드러나는 그의 삶의 광장은 점점 좁아져 결국 그는 사북자리까지 몰려왔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으로 인해 그는 삶의 광장 이면에 있는 드넓은 푸른 광장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죽음으로써 사랑을 완성한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명준은 주체됨과 동시에 죽음을 맞는다. 작품을 읽는 독자는 살아 가야 한다. 문학의 독자는 직접 죽지 않으면서도 다시 태어나기 위해, 좀 더 단순히 말하면 ‘더 나은 방식으로 살기 위해’ 문학을 읽는다. 명준은 주체로 죽었지만, 작가의 말처럼 그의 죽음이 “삶의 바다”로 내려보낸 “잠수부”였다면, 이제는 명준이 실종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한 고민은 작가의 다른 작품, 『태풍』으로 이어진다.[4]
앞서 오토메나크의 중립국 선택에서 사랑의 실현 가능성이 미래에 존재하며, 그가 극복해야 할 과거에는 사랑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오토메나크는 카르노스의 설득에 힘입어 중립국을 택할 수 있게 된다. 거기에 있던 또다른 조력자는 오토메나크와 사랑을 기약한 중립국의 여인, 아만다의 존재였다. 명준과는 달리, 오토메나크가 짊어져야 할 과거에는 사랑이 없으며 오히려 중립국으로 향해서 ‘살아’ 남았을 때에 사랑을 성취할 수 있다. 따라서 카르노스가 이데올로기에 젖은 사고에서 그를 구출해 주었을 때, 그에게는 과거로 회귀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되고, 결국 살기를 결심한다. 그런데 오토메나크는 카르노스를 만나고 난 다음, 살아남을 결심을 내리기까지 고민하던 보름의 기간에 니브리타 출신의 여인 메어리나와 눈이 맞게 된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아만다와의 사랑은 미래에 실현 가능성을 가진다. 그러나 그 미래의 지향은 과거와 연결되지 않는다. 즉 과거 아만다와의 사랑이 미래에서 실현되어야 할 어떠한 필연성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광장』에서의 명준에게는 그러한 필연성이 존재했다. 과거를 미래로 끌고 나가야 하는 필연성이. 명준에게는 은혜와 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만다는 오토메나크의 아이를 잉태하지 않았다. 반드시 아이의 잉태만이 오토메나크를 아만다에게로 붙들어 놓았으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광장』에서의 아이의 존재와 같이 과거의 사랑을 미래로 실현시켜야 하는 필연성이, 오토메나크에게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처럼 불 같은 사랑을 했음에도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메어리나와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명준이 가지지 못한 미래의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문제가 발생한다. 메어리나와의 결합이 현재가 된 순간, 아만다와의 사랑은 그가 짊어져야 할 새로운 과거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미래에 있던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이 현재가 될 때, 동시에 미래에 이루어져야 했을 ‘기존’ 사랑의 가능성은 과거의 문제로 떠오른다. 그렇다면 오토메나크는 이 과거의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그는 이 과거를 감추고 살아가기로, 애써 외면하기로 선택한다. 그리고 그 자리를 다른 것으로 메꾼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할 수 없는, ‘미봉’의 상태이다. 그가 식민지가 된 자신의 조국 애로크를 외면하고 철저한 친나파유주의자가 되기를 결심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친구 마야카로부터 나파유의 현실을 알게 된 것처럼 그것은 망각되거나 온전히 대체될 수 없다.
후일 오토메나크는 바냐킴이라는 이름으로 중립국에 정착하고, 아만다는 사실 카르노스의 정부[情婦]이자 스파이였음이 밝혀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만다와의 사랑의 실패는 이미 메어리나와의 만남에서부터 이미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만다가 카르노스의 정부였다는 사실은 그녀와의 과거를 더 쉽게 감추도록 도왔을 뿐이리라. 그럼에도 과거의 실패한 사랑으로서의 아만다는 여전히 남아있다. 바냐킴이 남몰래 애로크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했음에도, 친나파유의 과거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오토메나크는 중립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했음에도, 자신의 감춰진 과거를 들추는 ‘태풍’이 불어오면 “낯빛이 거의 흉악하게(484)” 변하기도 한다. 그 모습은 아이히만의 애너그램 재구성으로 추정되는 “만하임의 얼굴과 몹시 흡사(484)”하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태풍’은 개인의 내면에 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작품 내의 여러 기제들의 메타포이다. 작품 마지막에 오토메나크가 말하는 것처럼, “태풍을 만나도 사는 길이 있(498)”다. 그러나 그는 실패한 아만다와의 사랑과 친나파유주의자로서 활동했다는 “과거의 엄존성(정과리, 2001)”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최인훈의 두 소설은 과거의 무게를 지고 주체로 일어선다는 것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 두 소설의 주인공은 이데올로기와 사랑의 문제가 잔존하는 과거의 문제에 나름의 방식으로 격렬히 투쟁한다. 하지만 그들은 성공하지 못한다. 명준은 사랑을 좇아서, 오토메나크 또한 바냐킴의 탄생을 위해 과거의 바다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실패하지도 않았다. 명준과 오토메나크가 몸부림치며 가라앉은 바다 위로 여전히 조그만 공기 방울이 올라온다.
[1]
해당 부분은 작가의 10번째 개작이 반영된 2014년 판본을 기준으로 함을 밝힌다. 작가는 2010년 10번째 개작을 통해 명준이 태식을 고문하고 윤애를 겁탈하려 했던 장면을 꿈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바꾸었다.
[2]
『태풍』에는 단어의 철자 순서를 바꾸어 연관이 있는 다른 단어를 만드는 애너그램 기법이 많이 사용된다. 이는 실제 세계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허구의 세계를 만드는 데 기여함으로써, 작품의 주제의식을 강화한다. 이를테면, 오토메나크[Otomenak]는 카네모토[Kanemoto]의, 애로크[Aerok]는 코리아[Korea]의, 나파유[Napaj]는 일본[Japan]의, 니브리타[Nibrita]는 영국[Britain]의 재구성일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사례가 존재한다.
[3]
인민군의 간호병으로 지원한 은혜는 결국 폭격으로 인해 전사하였기 때문이다.
[4]
최인훈, 「1973년판 서문 ―이명준의 진혼을 위하여」, 『광장/구운몽』, 최인훈 전집 1, 재판본(2014년), 문학과지성사, 2008, 16-17.
참고 문헌
정과리(Kwar Ri Jung), "작가 읽기 / 최인훈 : 모르기, 모르려 하기, 모른 체 하기 - 『광장』에서 『태풍』으로, 혹은 자발적 무지의 생존술 -." 시학과 언어학 1.- (2001): 111-143.
최인훈, 『광장/구운몽』, 최인훈 전집 1, 재판본(2014년), 문학과지성사, 2008
, 『태풍』, 최인훈 전집 5, 재판본, 문학과지성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