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욕설은 남의 인격을 무시하는 말, 또는 남을 저주하는 말이다. 욕설은 그것의 단순한 정의를 넘는 함의를 갖는다. 사람들의 일상에 잘 녹아들어 있어, 그들의 인식이 자연스레 반영되어 있는 까닭이다. ‘병신’은 그중 하나이다. 병신은 신체의 어느 부분이 온전하지 못한 기형이거나 그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이 단어가 욕설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만연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장애인은 명백한 사회적 약자이다. 사회적 약자는 세계를 ‘경험’하는 데 있어 많은 제약을 느낀다. 그런데 그런 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장애인이 느끼는 제약은 좀 더 특수적이다. 그들이 경험하는 제약은 이중적인 구조를 가진다. 우선 그들은 세계를 ‘경험’하는, 즉 감각하고 느끼는 몸의 제약을 받는다. (신체적 제약)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몸을 통해 경험하는 ‘세계’에서도 제약을 받는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해당된다. 사회적 차별과 억압은 그들이 대등한 위치에서 세상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사회적 제약)
세계를 경험하는 것에 대한 제약은 그 자체로도 정의롭지 못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감각을 통해 얻는 구체적인 경험들은 인간 정체성 형성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이 자유롭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또한 왜곡될 경우 인간의 실존이나 자아에 직결되는 부정적 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논하기 위해 경험과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 올리버 색스의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책에서 저자는 신경학과 의사로서 자신이 맡았던 환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환자들을 관찰하고 치료하고자 애쓴다. 그는 환자들이 가진 병뿐만 아니라, 병을 가진 환자에도 주목한다. 그가 관찰했던 환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그들 모두 주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경학적 장애에 맞서서 실존적으로 투쟁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애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조화와 안정을 추구한다.
또한 저자는 지적 장애를 가진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가진 마음의 ‘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그들의 마음에 설령 ‘지능 상의 결함’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이외의 정신적인 면에서는 흥미롭고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적장애인이 가진 마음의 ‘질’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구체성’이다. 그들의 세계는 생기 있고 정감이 넘치고 상세하면서도 단순하다. 왜냐하면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추상화를 통해서 복잡해진 것도, 희박해진 것도, 통일된 것도 없다. 그러면서 그는 ‘구체성’이야말로 기본이며, 현실을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것으로, 개인적이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구체성’을 상실하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골드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구체성, 구체적인 사상’을 열등하고 고려할 가치가 없으며 통일성이 결여되고 퇴보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인간의 정신에 추상화와 분류를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을 훌륭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따라서 만일 인간이 ‘추상적 범〮주적인 태도’ 혹은 ‘명제적인 사고력’을 잃으면 도리 없이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며, 중요성도 없고 관심의 대상도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현재 사회 통념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은 정반대이다. 인간이 퇴행하면 구체적인 것밖에 이해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구체적인 것을 이해하는 원래의 능력은 상실되지 않고 남는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적인 인격과 정체성 그리고 손상받기는 했지만 엄연한 생명체로서 버티고 있는 존재 그 자체는 상실되지 않고 남는다고 주장한다.
구체성은 개별 경험과 지각에 주목한다. 그런데 정말 우리의 경험이나 지각이 기본적인 인격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철학자 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감히 말하자면 우리는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하다. 그러한 감각은 믿기 어려운 속도로 차례차례 이어지고 움직이고 변화하고 흘러간다.
그의 주장대로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들이 ‘믿기 어려운 속도로’ 움직인다면, 그리고 우리는 단순히 찰나의 감각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면, 그러한 감각에 기초한 우리의 경험이나 지각이 과연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하지 않으며,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느낀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각자 오늘날까지의 역사, 다시 말해서 과거라는 것을 지니고 있으며 연속하는 ‘역사’와 ‘과거’가 각 개인의 인생을 이룬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인생 이야기, 내면적인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와 같은 이야기에는 연속성과 의미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인생이기도 하다. 그런 이야기야말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기 정체성이기도 한 것이다.
흄이 우리가 느끼는 감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제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의 지각을 파악하고 지속적인 개체 혹은 자아에 의해 통일을 유지함을, 그리고 그런 통일은 이야기의 형태로 이루어지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기 정체성이기도 함을 간과하였다. 그렇기에 인간이 이러한 이야기의 형성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고, 조화와 안정을 추구한다는 점도 고려하지 못했다.
이야기로서의 정체성에 관련한 슬픈 사례가 있다. 책에서 언급된 톰슨이라는 환자의 이야기다. 그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급조해내는 굉장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실은 몇 초만 지나면 자기가 말한 것을 잊어버리는 심한 기억 상실증을 앓고 있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필요하다면 되살려서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들을 메우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던 것이었다.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할 내면 이야기의 상실이 그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급조하게끔 내몬 것이다. 이는 앞선 저자의 주장을 단적으로 뒷받침하는 예이다.
정체성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다. 우선 정체성이 고정되어 있는 개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럼으로써 어떤 정체성,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담론의 여지를 제공한다. 그리고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비단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접 만들어나가는 태도를 가질 능동성을 부여한다.
앞서 환자들(특히 신경학적 장애를 가진 환자들)에게 가해지는 두 가지 제약에 대해 언급했다. 하나는 사회적 제약이고, 다른 하나는 신체적 제약이다. 이러한 세계를 ‘경험’하는 것에 대한 이중적 제약으로 인해 정체성 형성 과정이 자유롭게 이루어지지 못하거나, 또한 왜곡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분명하다. 바로 그들이 장애를 안고도 세상을 마주 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구체성’은 열쇠 말이 된다.
먼저 사회적 제약의 해결을 위한 여건 마련에 있어서, ‘구체성’ 프레임은 기존의 ‘추상성’ 프레임의 대안으로 기능할 수 있다. 위의 '2. 신경학적 장애를 가진 환자들의 특징: 강한 주체성과 구체성'에서 언급했듯 골드슈타인을 비롯한 학자들은 ‘추상성’ 프레임을 옹호하며, 이는 사회적 통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존 프레임의 타파는 대안 제시와 함께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구체성’ 프레임이 받아들여졌을 때, 비로소 환자들은 ‘구체적인 것밖에 이해할 수 없’는 저열한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것을 이해하는 원래의 능력은 상실되지 않고 남’은, 따라서 ‘기본적인 인격과 정체성 그리고 손상받기는 했지만 엄연한 생명체로서 버티고 있는 존재 그 자체’로서 평등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
다음으로 신체적 제약의 해결을 위한 여건 마련에 있어서, ‘구체성’은, 환자들이 몸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인체공학적, 신경학적, 심리적 기구나 장치의 개발 과정에서 핵심적 고려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사회적 제약의 해결을 위한 여건이 잘 마련되면 될수록 합목적적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첫 번째 이야기이자, 제목이 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는 추상의 세계에서 길을 잃은 P 선생이 등장한다. 그의 시각이 가진 추상적인 능력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지만, 구체적인 능력은 크게 손상되었다. 예컨대 그는 대상을 분류하고 범주화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하지만 그것을 판단하고 느끼는 능력을 크게 상실했다. 그는 골드슈타인의 사고와는 정반대로 ‘구체성’에서 ‘추상성’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기도 했다. 이는 구체성을 등한시하고 추상성에만 집중했던 기존 프레임의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아내를 아내로 봐야 한다. 그것은 P 선생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동안은 눈을 감고 어림짐작했다면, 이제는 눈을 뜨고 아내를 ‘직접 보기’만 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