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 「모르그 디오라마」
2019년 현대문학상 수상작 「모르그 디오라마」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소름돋게 현재의 텔레그램 사건에 대한 통찰을 제시했습니다. 박민정은 현실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그 현실은 비로소 드러났습니다.
작품 내에서 주인공은 종종 스펙터클의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셨던 교수님을 떠올립니다. 여기서 스펙터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스펙터클은 쇼를 의미하는 라틴어 스펙타클룸spectaculum에서 온 프랑스어로, 14세기 이후 ‘특별히 준비되고 마련된 전시’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외양 자체가 볼 만한 이벤트, 즉 특별한 또는 ‘새로운 볼거리’라는 의미로 널리 사용됩니다.
이런 스펙터클의 개념은 이 책의 제목이 된 모르그 디오라마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19세기 파리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전람회장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슈와르츠는 ‘산보자의 스펙터클’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파리 산보자는 파리의 대로를 걸으며 대로변에 자리잡고 있던 다양한 건축물, 그리고 박물관과 같은 관람 공간이나 동영상 장치들을 구경하는 존재였습니다. 대로 문화, 대중 신문, 밀랍 박물관, 파노라마와 디오라마, 영화관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시체 공시소 모르그도 그런 스펙터클의 한 종류였습니다. 이에 대해 슈와르츠는 도시 생활 자체가 스펙터클로 전환되고 있는 상황이라 말하며, 이것이 대중 문화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19세기의 파리와 21세기 대한민국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요? 현재 우리는 모바일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19세기 파리의 산보자들이 거리나 공간 미디엄을 보았다면, 이 시대의 산보자들은 모바일 미디어를 봅니다.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스마트폰은 이제 사람들 육체의 일부가 되었다. 스마트폰 사용자 모두에게 모바일은 구체관절이나 다름없었다…
이 구절은 모바일이라는 구체관절을 활용해 미디어를 구경하는 디지털 산보자로서의 우리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어항 너머 금붕어를 보면 두 손가락 벌려 확대해 본다는 신인류들’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19세기 파리의 스펙터클이 미디어에 의해 재구성된 ‘현실(actualities)’이라면, 디지털 산보자가 접하는 스펙터클은 근본적으로 ‘가상(visualities)’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가상과 가짜는 다른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가짜’보다 ‘진짜’를 추구하곤 합니다. 마치 오기된 혈액형으로 인해 혈액형 검사를 받아 증명하라고 했던 ‘나’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진짜를 향한 열망은 가상 세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나’는 원치 않는 영상에 담기고 있는 피해자를 재현하는 저질 성인 웹툰을 보면서 전부 가상이라 생각하면 그만이라고 여깁니다. (이 부분은 가상과 가짜를 혼동하는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나’가 일하던 웹사이트에 음란물을 배포한 중학생 소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래도 진짜잖아요… 사촌형이 국산 아니면 볼 필요가 없대요. 전부 가짜라고…
이처럼 가상 세계 속 디지털 산보자가 된 우리들의 삶이 결코 진짜에 대한 열망의 감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가상의 것들을 즐긴다고 해서 그들이 ‘진짜’에 부여하는 가치가 낮아진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병적으로 ‘진짜’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나’는 자신의 친구들과 자신들이 믿는 ‘가짜’에 대해, 세기말 정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노스트라다무스, 우주, 버뮤다 삼각지대를 믿는 다른 친구들에게 주인공은 UFO, 아니 정확히는 날지 않으니까 UO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본인은 거기서 한 번 죽었던 적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주인공은 사진 이론을 전공한 사람이지만 초상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달아나 버린다는 말을 아직도 믿고 있습니다.
이런 ‘가짜’들은 다소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진짜’도 아니고 객관적인 근거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가짜’들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맞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꽤 그럴싸해 보입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무언가 그것을 믿고 싶을 만한 동기가 있습니다.
‘나’의 친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그런 거 이해 못해. (…) 그건 우리 때의 정서일 뿐이야, 세기말 정서. 그런 말 하면 노인네 취급을 받는다고. (…) 2000년 1월 1일에 뉴스 앵커가 진지한 얼굴로 “여러분, 지구가 종말하지 않았습니다. 안심하셨죠? 또한 밀레니엄 버그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을 믿지도 않아. 애들 반응은 그저 헐, 대박. 바보 아니야? 이러는데, 그때 우리가 애건 어른이건 집단 바보라서 세기말 정서에 빠진 게 아니라는 걸 요즘 애들은 절대 이해 못 해……
역설적이지만 비합리성의 추구에는 어느 정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녀의 경우에 자신의 트라우마적 경험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무척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도 UO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트라우마적 경험은 어느 정도 ‘가짜’의 형태로 만들어졌을 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UO에 대한 그녀는 UO에 대해서 놀라우리만큼 담담하게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런 ‘가짜’에 대한 믿음 중에는 종말에 대한 나의 생각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종말에 대한 꽤나 구체적인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종말에 대해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느끼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만약 지구의 마지막 날이 온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손을 잡고 눈을 꼭 감고 소멸하리라, 생각했던 내게 아른거리던 이미지는 언제나 임사 체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분신사바를 하며 놀았던 친구들과 체육관 구석 매트리스 더미에 기대앉아 소멸하는 장면이었다. 노트에 그런 그림을 그렸던 적도 있다. 거기 부모는 없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을 종말을 믿고 구원을 기다리는 지하벙커의 광신도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종말과 구원을 죽음과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차이는 비동의 성적 촬영의 피해자라는 ‘나’의 경험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피해자들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나’에게 사진이론을 가르쳐 주신 교수님은 프랑스의 시체 공시소 모르그에 전시된 한 소녀의 시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루에 만 명 이상이 몰려들기도 했다고 했다. 쇼 케이스 너머에 있는 시체를 구경하러. 1880년대 후반, 센강에서 건져진 소녀의 두상, “센강의 신원 미상의 소녀”에 대해 교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설명했다. 폭행의 흔적도 없이 깨끗했고, 게다가 예상했겠지만, 아름다웠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죠. 남자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이 호사가들 사이에서 파다했고요. 그녀의 두상은 매장되기 직전 공시소의 병리학자에 의해 석고로 제작됩니다. 이 두상은 수많은 복제본으로 만들어졌고, 먼 훗날 구강대의 구강 소생법 훈련을 위한 심폐소생술 마네킹이 되었습니다.
센 강의 소녀는 사망한 후에도 안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녀의 시체는 많은 파리의 산보자들에 의해 소비됩니다. 매장된 후에도 그녀의 두상은 수많은 복제본이 만들어져 아직도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비동의 성적 촬영물의 피해자들은 이미 성적 촬영이라는 ‘죽음’으로 영혼을 빼앗겼지만, 그 죽음 이후에도 끊임없이 고통받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촬영물이 하나의 스펙터클로 어딘가에서 소비되고 복제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삶을 살아가거나, 또는 마감합니다. 많은 디지털 산보자들은 이런 관음적 방식으로 ‘진짜’에 대한 자신들의 욕구를 해소합니다. 피해자들은 죽은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런 ‘죽음’이 아니라 ‘종말’입니다. 지구의 마지막 날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손을 잡고 눈을 감고 소멸하는 것. 자신의 죽음 뒤에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소비할 수 없는 그런 종말. 그것은 곧 구원이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거기에 자신이 ‘진짜’ 자식인지 ‘가짜’ 자식인지 판별하려던, 그래서 자신을 UO 속으로 몰아넣은 부모와 같은 사람들은 없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구글에 접속해서 ‘서울’ ‘길거리’ ‘일반인’, 그리고 ‘서울 거리 여자’를 쳐 보았다. 이것이 서울 피토레스크였다. 교수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었다. 1999년의 우리들이었다면 다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여긴 우리가 죽은 세상이야, 우리는 이곳에 적응해서 살든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노력해야 해, 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용기를 내 웹하드 사이트에 접속해 보았다. 성인물 카테고리에 ‘국산’이라는 네임카드가 붙은 게시물을 하나씩 클릭해 봤다. 전부 비동의 유포 성적 촬영물이었다. “내 친구가 찍은 내 여친……” 나는 이토록 수많은 ‘일반인’들을 살아가면서 대면해본 적 없었다.
소설 속에 나오는 비동의 성적 촬영물의 실태를 보여주는 구절들입니다. 이처럼 수많은 ‘일반인’들이 스펙터클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19세기 파리의 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21세기의 서울 거리 또한 스펙터클화 되고 있습니다. 전자에서 모르그의 시체들이 그랬듯 후자에서는 비동의 성적 촬영 피해자들은 특히나 더 관음적인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이런 한국의 모바일 환경은 19세기 파리의 모르그의 디오라마입니다. 디오라마는 스튜디오 안에서 만들 수 없는 큰 장면의 촬영을 위한 세트로 쓰이는 작은 모형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디오라마의 수준을 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9세기 프랑스의 파리에서 보였던 관음주의적 스펙터클화는 더 잔인하고 끈질긴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의 시체를 구경하다 못해 파헤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그들에게 최소한의 존엄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소설 「모르그 디오라마」는 비동의 유포 성적 촬영물이 21세기 디지털시대의 스펙터클이자, 여성들의 죽음(시체)에 관한 방대한 목록이며, 벌거벗은 생명에 가해지는 폭력과 살인의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더 나아가 현대사회에서 생명정치의 통치 메커니즘은 전통적인 국가기구를 넘어서 사적 영역에 구축된 데이터베이스에 의해서도 작동하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벌거벗은 생명과 관련됭 생명정치 및 생명권력은, 수용소와 같은 억압적인 공간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몸을 숨기고 폭력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 비동의 유포 성적 촬영물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생명권력에 대한 일상적인 공모와 동의의 구조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 여기까지 이르렀다면 어떻게 이 소설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있을까.
- 김동식(평론가, 인하대 교수), 2019년 현대문학상 심사평 中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 스펙터클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91543&cid=42171&categoryId=42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