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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기 Jan 02. 2022

자기 앞의 생의 이면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 과 이승우의 <생의 이면>은 제목에 생이 들어간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비슷한 점이 꽤 있다. 혹시라도 두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이 글을 읽고 나서 하나라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가장 먼저, 두 화자이자 주인공이 자신의 생을 서술하는 방식이 비슷하다. 생의 이면은 일종의 액자식 구성을 통해 작품 속 화자인 '나'가 '박부길'이라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을 통해 작가 '이승우'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낸다. 로맹 가리 역시 가상의 작가인 '에밀 아자르'를 내세워 화자 '모모'에게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녹여낸다. 이승우는 '나'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을 닮은 인물 '박부길'을 작품 속 화자인 '나'의 관찰과 '박부길'의 소설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다. 로맹 가리 또한 '에밀 아자르'라는 가면을 쓰고 '모모'라는 인물의 회고를 이용해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 있다.


  자기 앞의 생은 로맹 가리가 본인의 이름으로 쓴 자전적 소설 새벽의 약속과 그 구도와 줄거리가 거의 일치한다. 주인공의 문화나 환경은 많이 다르지만, 애초에 스스로를 숨기고 쓴 소설이니 생긴 이런 차이를 제하면 두 소설은 사실 같은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인공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강하고 인자하며 현명한 어머니와 둘이서만 살아가는데, 그 생활 속에서 상당히 많은 시련과 성장을 겪으며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커다란지,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재차 확인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어머니를 앗아가지만 어머니가 내게 준, 그리고 어머니를 내어준 이 삶을 사랑하겠다는 다짐으로 끝을 맺는다.


  반면 생의 이면 속 '박부길'에겐 부모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존재하기만 한다. 그의 부는 정신에 이상이 생겨 집 별채에 홀로 감금되어 있고, 그의 모는 남편의 정신 이상과 가족 간의 불화를 못 견뎌 가족을 떠난다. 따라서 박부길은 부모의 사랑이란 게 무엇인지 느끼지 못한 채로 자라야만 했다. 심지어 부모의 사랑을 대신 채워줄 사람도 없었다. 그 고독하고 음울한 환경 속에서, 대학교에서 만난 연상의 연인이 한 줄기 빛이자 구원이 된다. 하지만 너무 어렸으며 사랑에 서툴렀던 박부길은 그녀를 잃고 만다. 영영. 그렇게 그의 고독을 달랠 유일한 수단인 글과 책을 벗 삼아, 박부길은 어린 시절 자신의 이야기를 원동력 삼아 소설로 써내려 갔던 것이다.


  따라서 생의 이면은 그다지 희망찬 소설도 아니고, 읽고 나서 마음이 뿌듯해 지거나 내일을 바라보게 하는 소설도 아니다. 생이란 것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고, 내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물론 자기 앞의 생도 이런 성찰을 불러일으키지만, 생의 이면처럼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소설은 아니다. 결국 두 소설은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도 있고, 삶에서 결핍된 요소를 어떻게 충족시키거나 대체시킬 수 있는지를 다룬다고 볼 수도 있다. 허나 두 소설이 무엇을 어떻게 다루든 간에 내가 하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 두 책을 읽는 내내 너무 행복했다는 것이다. 유려한 문체와 섬세한 묘사, 그리고 간간이 등장하는 풍자와 사회 모순에 대한 조소는 정말 맛있었다.


  마지막으로 첨언하자면, 이 글은 사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두 소설의 인상을 토대로 쓴 것이다. 그렇기에 정확하지 않을 것이며 분석도 뭣도 아닌 일종의 추억 팔이에 가깝다. 난 그저 이 글을 읽은 사람이 자기 앞의 생과 생의 이면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길 바랄 뿐이다. 줄거리를 전부 스포일러 해버렸지만, 두 소설은 줄거리가 중요한 소설이 아니기에 괜찮지 않을까 싶다. 혹시 괜찮지 않았다면 사과한다. 끝까지 읽어줘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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