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52: 또 한 시절이 갔다
매거진은 망했다. 매주 토요일마다 유학생, 혹은 '현지인'으로서 야금야금 이곳의 이야기를 알차게 써두겠다던 다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맘처럼 되는 것 하나 없는 타향살이와 내가 놀러 온 게 아님을 매 순간 부지런히 일깨워주는 대학원 생활 앞에 하릴없이 무너졌다. '토요' 매거진은 고사하고, 미리 약속했고 다시 여러 차례 미루어 온 출판 일정도 전혀 맞추지 못했다. 건강이 가파르게 깎여나간 자리에 지방이 착실히 들어앉았고, 목표했던 해외 취업 기회는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알아보지 못했다. 국제 연애를 꿈꾸기도 했었지만 몇 번의 데이트 후 어딜 가나 나와 맞는 사람 찾는 건 힘들구나 하는 것만 깨달았다. 참 많은 부분에서 망했다.
다행히, 학교는 망하지 않았다. 최종 논문 심사 결과는 11월에나 받을 수 있지만, 그래도 그간 제출한 과제들과 시험 성적을 종합해 볼 때 논문이 통과만 된다면 드디어 학위증 한 장을 손에 쥘 수는 있을 것 같다. 으, 눈물겨워라. 이걸로 이제 무얼 하지? 모르겠다. 지난여름 미리 찍은 졸업사진과 함께 액자에 끼워 내 책상 위에 나란히 올려 둘까 보다. 애초에 내 직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전공을 택한 것도 아니었고 석사를 가지고 뭘 획기적으로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유학을 온 것이 아니어서, 그냥 이 나이에, 외국에서, 팔자에 없는 공부를 하느라 참 고생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훈장 정도로 갖고 있으면 될 것 같다. 가끔 먼지도 반짝반짝 닦아 주어야지. 고생했다. 잘했다. 하면서.
내일 아침에 떠난다. 이대로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기에는 아쉽고 뭔가 내 인생에서 언제 또 이런 긴 시간을 혼자 가져보겠나 싶어, 약간 무리를 해서 30박 32일의 여행 일정을 만들었다. 안 그래도 반 파산인데, 돌아가면 왕 파산이다. 당분간은 입 다물고 열심히 일해야겠다. 대학 때도 안 해본 긴 배낭여행을 코앞에 두고 설렘보다는 돌아가 먹고 살 걱정부터 드니 삼십 대는 삼십 대다. 지금부터 꼭 십 년 전, 석 달쯤 살았던 곳을 떠나며 도시 곳곳에 배인 추억들을 혼자 되새기느라 눈물 삼키던 때를 생각해보면 어른으로 살았던 지난 십 년 동안 나는 헤어짐에 꽤 적응을 한 건가 싶다.
그래도 마지막 날은 마지막 날인 건지, 짐을 싸고 부치느라 며칠 째 갈아입지 않은 셔츠를 걸치고 카페에 혼자 덜렁 앉아 있는데 뭐가 자꾸 가슴에 턱 턱 걸리긴 한다. 좋았던 기억들보다 힘들었던 순간이 정말 훨씬 훨씬 더 많은데, 그 모든 순간이 또 다 내 인생이었던지라 생각할수록 이다지도 소중할 수가 없다. 말이 안 되는 도전을 이겨낼 때마다, 힘든 고비를 결국 넘길 때마다, 힘들었던 만큼 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다. 내가 눈물겹고, 내가 짠하고, 내가 장하다.
후지와라 산야의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분명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가슴이 답답한 일도 많았지만, 정말로 열심히 스스로를 테스트한 것 같아요. 전부 토해냈다는 어떤 충족감 같은 것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고마워! 도쿄'라고 말하고 싶어요. 도쿄에 처음 왔을 때 도쿄타워에서 휴대폰으로 찍은 도쿄 사진을 보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요."
내가 여행했던 곳이라면 어떤 땅도 미워할 수 없었던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아무리 가혹하고 힘든 일이 많았어도 그녀는 절대 도쿄를 부정하거나 증오할 수 없다. 그것은 도쿄와 함께했던 자신을 부정하고 증오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중략) 도쿄에 매몰되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해 자신을 긍정했던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스물셋이 아닌 나는 이제 떠나기 전부터도 알 것 같다. 내가 나중이 되어 그리워할 것은 이 도시가 아니라 이 시절일 것임을. 어느 날 문득, 이 시절을 살았던 내가 사무치게 그리워 술 한 잔 하고 싶어질 것을.
나를 모두 토해냈던 또 한 시절이 갔다.
고마워, 런던.
*
도장 열 개가 꽉 찬 쿠폰을 쥐고 카페에 와서 짐짓 감정에 차올라 마지막 커피 한 잔을 샀는데, 눈치 없는 직원이 새 쿠폰에 새로 도장을 하나 찍어 다시 내게 내민다. 감정적 얼굴 급 철수. 어쩔 수 없이, 이 도시엔 다시 와야겠다. 아홉 잔이나 남은 커피 쿠폰을 채우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