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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바이킹 Jun 06. 2019

다시, '퇴사하겠습니다'

29/  모든 순간의 나를 존중할 것이다



드디어 적절한 타이밍이 왔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여러 모로 곤란해진다. 수십만 번의 리허설에도 좀체 잘 달라붙지 않는 그 말을 혀 위에서 다시금 이리저리 굴려 본 뒤 손바닥에 맺힌 땀방울을 바지에 쓱 한번 옮겨 붙였다. 후우- 심호흡. 이젠 가야지. 스스로에게 망설일 여유를 주어선 안 된다. 한 걸음, 두 걸음, 이제 저 문을 열고 들어가 앉으면, 누군가 뒤통수를 날려 치기라도 한 듯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혀 위에 있는 것을 테이블 위로 쳐내는 거다. 똑똑. 피유웅-!


"저... 회ㅅ@^%$%를.. 그ㅁ...$%/@*&#...구요."

"...?"


인생 두 번째 퇴사가 시작되었다.



*

복직 후 세 달 만이었다. 삽시간에 나는 참을성 없는 애, 끈기 없는 애, 생각 없는 애, 자존심 없는 애, 배려 없는 애 등등 수많은 것들이 '없는 애'가 되었다. 가슴 어디쯤이 얹힌 듯 저렸지만 그렇게 보일 수 있겠다 싶기는 했다. 속에 그 얼마나 오래고 깊은 생각의 뿌리를 키워 왔었건 겉으로 보인 것은 마침내 툭 터져 나온 퇴사, 한 마디가 전부니까. 본인에겐 오랜 인내의 열매인 퇴사라는 결정은 타인에겐 언제가 됐든 갑자기일 뿐이다.


그래도 '생각 없는 애'라는 것은 좀 많이 아팠다. 일일이 반박해 댈 이유도 없었지만 반박을 한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그 누구라도 납득을 시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그저 명치만 쿵쿵 쓸어내리고 말았다. 누가 뭐라건 나는 참을성과 끈기와 자존심과 배려가, 무엇보다 생각이 없는 자가 아니다. 적어도 나 스스로는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 여기서 굳이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며 약한 소릴 덧붙이는 건, 폭풍처럼 흘렀던 퇴사 즈음의 시간 속에서 나의 중심을 지킨다는 것이 퇴사를 결정짓던 것만큼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처음 하는 퇴사가 아니었고 어느덧 직장인 10년 차라는 뻐근한 무게를 갖고 있었지만, 나는 7년 전 첫 회사를 나오던 그때와 똑같이 영향받았고, 상처받았고, 조바심쳤고, 괴로워했다. 마치 '퇴사자 공통 매뉴얼'이라도 있는 것처럼 당시와 하나 다르지 않은 '그래서 뭐 할 건데'와 '너 생각해서 하는 얘기들'을 들었고, 내 결정과 고민의 시간을 단번에 후려치는 그것들은 단단히 고정시켰다 믿었던 마음의 밑동을 쥐고 사방으로 흔들었다. '정말 내가 뭘 심각하게 잘못하고 있는 건가?' 흔들흔들, 삿대도 없이 떼밀리며 생각했다. 눈을 감으면 나를 패배자라 손가락질할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들이 아른거렸다. 어떻게 맘을 좀 잡아보려 예전에 썼던 글들을 펼치면, 한 번의 이직 후 마치 세상 모든 이치를 깨친 듯 써놓은 글 속의 나와 그와는 전혀 반대되는 지금의 내 모습이 우습게 겹쳐지며 한없는 자괴의 늪에 빠지기도 했다. 더 이상 특별한 사건 없이도 기분이 바닥을 치는 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모든 것이 처음인 양 휘청거렸다.


무엇도 분명하지 않은 시간을 지나며, 반대로 한 가지 사실이 점차 선명해졌다. 또 한 번 퇴사를 하는 과정에서 처음 퇴사할 때의 일들을 다시 고스란히 겪어야 했다면, 나의 새로운 직장이 될 곳에서도 나는 이곳에서 지나야 했던, 이제는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던 그 긴 터널을 처음부터 또다시 지나야 할 것이겠구나. 새 출근의 설렘은 곧 출근도 전에 퇴근하고 싶다는 피곤함으로 바뀔 것이고, 딱 죽을 것 같지만 내 선택의 무게에 눌려 아무것도 어쩌지 못할 때가 곧 올 것이고, 억장이 무너지는 후회와 후회하지 않으려는 자존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대체 언제쯤이면 안정될 수 있겠냐며 어느 그대로의 퇴근길 길가에 주저앉아 울기도 할 것이겠구나.


이제 깨닫는다. 나는 내가 처음 「두 번째 초년생」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시작할 때 생각했던 것처럼 신입사원을 두 번 했다는 이유로 다만 '두 번째' 초년생이었던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날들에서도 새로움을 마주하는 한 그 시작점에서는 언제까지고 또다시 초년생일 것이겠다고. 제아무리 어떤 일에 인이 밴 누군가라 해도 내일부터 전혀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해야 한다면 그 처음은 장그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만두겠다’는 선택은 종점이 아니라 시작점이다. 무언가를 그만두는 순간, 그를 '그만둔 이후의 삶'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

나는 왜 한때는 꼭 맞는다고 확신했던 옷에 자꾸만 의문이 드는 걸까

고민의 순간마다 화살은 스스로를 향했다. 그렇게나 많은 고생과 품을 들여 맞춤 재단한 옷-나의 직업-이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내가 살이 찐 탓이고 내가 느슨해진 탓이고 내가 이제 와 다른 마음을 먹은 탓이라고. 내가 생각해도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이모저모 변했으니 이것은 맞는 말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틀린 말이다. 내가 변했다는,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사실일 뿐 일어나서는 안될 어떤 일의 '탓'이 아니다.


만일 내가 그 반짝이는 새 옷을 입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처음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면 아직 그 옷은 내게 꼭 맞았을지 모른다. 여전히 처음처럼 반짝이고, 여전히 베일 듯 선명한 각과 태를 자랑하며 내 어깨를 으쓱하게 해 주었겠지. 나 이런 멋진 옷이 꼭 맞는 사람이라며.


그러나 직장인인 우리는 직업이라는 옷을 입고 쉼 없이 걷고, 다니고, 만나고, 겪는다. 경험의 둘레가 늘며 생각엔 살이 붙고, 마음 구석구석 시간의 흔적이 쌓이고 가치관의 모양이 바뀐다. 입고 있는 옷도 변화를 맞기는 마찬가지다. 어느 부분은 닳거나 찢어져 수선이 필요하기도 하고, 더 이상 시류에 맞지 않거나 지금 나의 삶을 이루는 다른 취향들과는 어울리지 않음이 발견되기도 한다. 고민은 발전해서 이제는 '어떤 옷 하나' 보다도 그 옷을 입고 '어떤 삶을 살게 될까'에 방점을 두게 되고, 자연스레 이전에 선택한 옷과 조금씩 맞지 않는 부분들이 생기면서 새로이 눈에 들어오는 옷도 만들어 보고 싶은 스타일도 생긴다.


인생의 한 시점에 나에게 꼭 맞던 옷, 내가 너무나도 갖고 싶던 옷이라고 해서 생각의 체형이 달라진 후에도 그 옷을 벽에 걸어두고 '저 옷이 맞을 때까지 내 생각의 살을 다시 뺄 테다!'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한 회사에 입사한 모두가 그 회사의 사장이 되지는 않는다. 하나의 직업, 혹은 직장을 선택한 뒤 시간이 지나 또 다른 선택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저마다의 순리다.


변화란 늘 갑자기, 문득, 엄청난 계기를 통해 찾아오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면 언제나 내 안에서의 변화는 숨을 쉬듯 천천히,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다만 갑자기, 문득, 그를 인지하게 되는 엄청난 순간들이 있을 뿐. 우리 모두는 인생의 모든 시점에서 변하고 있다. 그것이 '큰일이 날 어떤 사건'이 아니라 자연스레 살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역시 어렵지만 천천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

직장인 7년 차에 쓰기 시작한 글을 어느덧 10년 차에 마무리하고 있다. 그사이 나는 과거의 내가 '너는 X발 행복하냐'며 대들었던 바로 그 선배가 되어 있기도 했고, 원하는 것을 향해 돌진하는 것만이 언제나 최선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고, 무엇보다 스스로 소스라칠 만큼 어느 부분에서는 이미 대단한 꼰대가 되어 있기도 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나는 변해 있었다.


2019년의 내가 보기에 2016년의 내가 하는 이야기는 많은 부분 설익었고, 가끔 어처구니없이 당돌하고, 종종 과하게 단정적이다. 도저히 한 줄 한 줄 읽기가 낯이 뜨거워, 나조차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길 책으로 낼 수는 없겠다며 3년을 기다려 준 편집자님 뒷목 잡을 소리를 하기도 했다. 여기저기 글 속의 나에게 마구 훈계질을 하고 싶다. '내가 다아~ 겪어 봐서 아는데 말이야아~!'


그런데 어쩌랴. 그때의 나는 뭐, 누구 다른 사람이었나? 지금의 나도 나, 그때의 나도 나인 것이다.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나'라는 것도, 결코 부서지지 않을 완벽한 깨달음이란 것도 없다. 그러니 나는 모든 순간의 나를 존중하기로 한다. 지나간 나에게는 미련이 남고, 지금의 나로서는 확신이 없고, 앞으로의 나는 누군지조차 알 수 없으니 나의 최선은 그 모든 나를 그때의 그 시점에서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우린 항상 옳은 선택을 할 수는 없지만, 언제나 나의 선택을 할 수는 있다.


나는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이곳에서 살아남기를 포기한 패배자일지 모른다. 그런데 산다는 게 꼭 뭘 이기려고 사는 건가? 어디에 있는지, 정말 있기는 한 것인지 모를 결승점을 향해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뛰고 또 뛰다 '아, 뭔지도 모를 뭔갈 찾다가 끝났네' 하기보다는, 목적지에 가 닿지 못하더라도 내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마음껏 달리다가 죽고 싶다. (쓰다 보니 2019년의 나도 여전히 과한 것 같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는 말보다, 세상엔 수많은 복수 정답이 있다는 말에 언제나 더 큰 용기를 얻는다. 그럼 어제의 나도 정답, 오늘의 나도 정답, 내일의 나도 모두 정답일 수 있으니까.


또 다른 3년이 흐른 뒤 나는 내 목숨줄마냥 지키려 애썼던 그 일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겪어 본 적 없는 새로운 갈증을 느끼며 답 없는 고민에 매몰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해서 나는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을까 나는 왜 내 인생을 내가 꼬고 있을까 스스로를 혼내지 않을 테다. 나는 계속, 답이 없더라도 고민할 것이고, 무겁더라도 나의 선택을 할 것이고, 그런 나를 최선을 다해 이해해 줄 것이다. 꿈꾸고, 만나고, 도전하고, 좌절하며 살아갈 모든 순간의 나를 존중하면서 지치지 않고 언제고 또다시 초년생이 될 것이다.



내가 그 어떤 터널을 통과하더라도 언제나 모든 것은 결과가 아닌 다만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너는 몰라도 고민해서 얻은 것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고민하는 것도 실력이라고 말해 준 나의 사랑하는 엄마에게 이 지난한 고민의 기록을 바친다.



「두 번째 초년생」 시즌 1 마침.





| 신입 영업사원, 신입 카피라이터로 두 번 입사한 10년 차 직장인. 2019년 현재 세 번째 회사에서 열심히 맨땅에 헤딩 중, 변비 같은 진로 고민은 여전히 죽지도 않고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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