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글술사의 꿈
'글밥 먹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소설가, 신문 기자, 작사가, 카피라이터, 시인, 말 그대로 글을 써서 밥을 벌 수 있는 사람들. 정확하게는 '가난한 소설가'나 '배고픈 시인'이 아니라, 밥그릇 수만큼의 분량이 되는 글을 써낼 수 있고, 그것이 밥도 사고, 옷도 사고, 커피도 사 먹을 수 있는 만큼의 가치가 있다 평가받는 사람들. 막연히 "저, 글밥 먹어요." 하는 모두를 동경했던 어린 시절엔 종종 'PAPER'라든가 'KTX 매거진' 같은 잡지에서 마주친 '자유기고가'라는 낭만적인 다섯 글자에 황홀해지곤 했는데, 그 낭만이 밥을 벌어 오려면 얼마큼의 자유를 헌납해야 하는지는 물론 몰랐다.
10여 년 전, 3년간의 영업사원 생활을 정리하고 카피라이터가 되었을 때의 환희는, 그토록 갈망했던 '천직'을 찾았다는 생각(착각)과 더불어 드디어는 나도 그 고귀한 글밥을 먹는 사람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그러니까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후로 나는 출간을 한 '작가'가 되었고, 신문에 정기적으로 글을 낸 '칼럼니스트'가 되어 보았으며, 지금 다니고 있는 네 번째 직장에서는 '에디터', '브랜드라이터', '콘텐츠라이터' 등의 여러 이름을 가지고 회사라는 곳에서 써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글을 쓰고 있다. 회사에서는 당연히 그 대가로 돈을 받고 있고, 칼럼을 내면 돈을 살 수 있었으며(?), 커피 한 잔 마시면 사라지는 정도이긴 하나 3년여 전에 출간한 책도 1년에 한 번 통장에 까꿍 안부 인사를 한다. 이 정도면 나는 글밥 먹는 사람인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대부분의 이런 질문에는 왜 항상 슬프게도 이렇게밖에 답할 수 없는지 모를 일이지만, 이번에도 답은 '아니'다. 글을 토핑으로 뿌린 회사밥을 십 년 이상 먹고 나자, 내가 하는 밥벌이는 '내가 쓴 글'을 돈으로 바꾸어 내는 거라기보다는 내가 가진 '글쓰기 능력'을 돈과 맞바꾸고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일은 글을 중심 콘텐츠로 한 무언가를 기획하거나, 회사가 필요로 하는 무언가를 글이라는 도구로 해갈하거나, 어딘가 2% 부족한 생각들을 글로 리본을 묶어 완결하는 일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글을 쓴다. 다양한 용처에서 다양한 필요에 의해 단어, 문장, 문단, 서사를 쓰고, 고친다. 하지만 일로 연이 닿은 '프리랜서' 에디터, 나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을 했지만 어느새 '전업' 작가로 성장한 ex-직장인들과의 마주침은 늘상 내게 쿡 하고 아픈 팩트를 찔러 건넸다. 너의 밥그릇과, 저들의 밥그릇 사이엔 여전히 '자유', '전부'와 같은 다름이 있다고.
반 연예인, 반 일반인을 칭하는 '연반인'처럼, 나는 제 밥의 대부분이 글인 줄로 알았지만 꼼짝없이 반은 직장인인 '글반인', 혹은 회사 내 이 부서 저 부서의 일을 받아다 납품하는 '회리랜서'같은 거였던 것 같다. 오롯이 써낸 글들로만 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막연한 동경을 품은.
그렇다면 돈이 되는 글이란 무엇인가. 남들이 돈을 내고 살 만큼 필요로 했던가, 그 글로 인해 시장에 없던 필요가 생기던가, 그 자체로 계속 찾아보고 싶게 되는 글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회사에서 쓰는 글들도 (재무 담당자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브랜딩과 마케팅적인 목적으로 쓰이니 돈과 아주 무관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의 시작과 끝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회사가 만들어낸 필요'이며, 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내가 고민하고 해내야 하는 일들의 대부분은 글과 관련이 없다는 차이가 있다. 그걸 또 근데 십 년이 넘게 열심히 하고 있다(개미는 뚠뚠). 어쨌든 매일 글과 관련된 무엇을 하고 있으니, 뭐라도 써대고 있으니,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은 맞는 것 같은데 정작 출간 이후 제대로 써낸 내 글 한 편이 없다. 회사라는 딱지를 떼면, 과연 어딜 가서 내가 밥그릇을 디밀며 글 줄 테니 돈 주시오, 할 수 있을까.
실제 회사라는 곳에서 카피라이터, 에디터와 같은 '글 담당자' 역할을 해본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귓불이 빨개지는 사기꾼 증후군(Impostor syndrome)의 허들 없이, 나는 글 써서 돈 번다! 내가 글밥 먹는 사람이다! 당당히 외치려면 명함에 적힌 타이틀이 아니라 '내가 언제나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필요하다는 것을.
회사를 벗어난 나라는 사람이 어떤 가치창출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겠다고, 회사원으로서는 단번에 지르기 어려운 만큼의 휴가를 모았고, 질렀다. 그간 기획과 명분이 바탕이 된 회사글을 써대느라(는 핑계를 대느라) 써보지 못했던, 내 맘 어딘가에 콱 얹혀 있던 나의 글들을 막힌 수도꼭지 뚫듯 거침없이 콸콸 틀어대겠노라고. 회사가 제공한 필요 없이도 누군가에, 어딘가에 필요한 글들을 충분히 써낼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을지를 스스로 테스트해 보겠노라고.
야속하게도 벌써 반환점을 도는 시점, 나는 콸콸콸은 고사하고 한 방울의 글도 짜내지 못한 채 또다시 하던 대로 그것이 실릴 '최적의 플랫폼'을 고민하고(각종 블로그 플랫폼들의 장단점 분석글 탐독), 내 느낌적인 느낌을 잘 살려보여 줄 '로고와 UI 디자인'을 상상(만) 했으며, 이런저런 글감들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들을 어떤 '컨셉과 기획'에 담아야 '지속성과 수익성'이 있을지를 (머릿속으로만) 따져 묻는 시간을 흘리고 있다. 당장 월급값을 내놓으라 쪼아대는 회사가 없으니, 머리는 회사원의 습관대로 영악하게 도는데 손은 빈둥빈둥 논다. 이래서야 어디 영원히 글반인, 회리랜서를 면하겠나. 정말로 언젠가 '자유기고'의 기쁨과 슬픔을 감당하고자 한다면, 얼마가 걸릴지 모를 잘 짜여진 기획안 하나가 아니라 지금 당장의 엉성한 시작들이 필요하다. 알긴 아는데...
'글밥'으로 검색을 했을 때 '평생 글밥 먹고 싶다, 책밥 먹고 싶다'는 열망 섞인 제목들이 몇 페이지에 걸쳐 정렬되는 것을 보면 그것은 나만의 동경은 아니었던 것 같다. 쉽게 이루고, 꾸려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많은 이들의 어려운 꿈이 되는 것이겠지. 자유와 책임 사이의 균형을 '단단한 루틴'이라는 근육으로 맞추어가며 다른 누군가가 아닌 스스로의 동력으로 글을 자아내는 '연글술사'들을 존경한다. 회사가 추구하는 최적의 길이 아닌 자신만의 방법으로 나태와 자기혐오를 이겨 결국에는 돈 되는 글, 즉 사람들의 공감을 사는 글을 완성해내는 그들의 '연글술'을 동경한다.
언젠가는 나도 이 어정쩡한 '반반무마니'의 상태를 벗어나 오롯한 글의 무게를 기쁘게 질 수 있기를 오늘도 막연히 꿈꾸며, 내가 오랜 시간 그토록 간절하게 물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잊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나는 이 순간,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