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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의 팥'은 무엇인가

006. 나를 나로 만드는 한 가지

by 작은바이킹



이번 달 칼럼은 흔들리며 썼습니다. 나가지 않은 싸움에서 진 것 같은, 가진 적 없던 것을 놓친 것만 같은, 출발하지 않았는데 가던 길을 잃은 것 같은, 누군가에게는 유난한 기분이고 나에게는 지난한 고민을 안고 마감날 새벽을 긁었습니다. 모든 것이 흔들릴 때 내가 붙잡을 하나는 무엇인가. 남들 다 그리 산다고 해도, 너는 뭐 다를 게 있느냐고 해도, 다른 모든 것이 바뀌어도 나를 나로 만들어줄 그 하나는 무엇인가. 누가 뭐래도 의미를 두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야 마는 연말입니다.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가 인기다. 25년간 한 회사에 재직한 주인공 ‘김 부장’이 겪는 직장 생활 안팎의 희로애락을 하이퍼리얼리즘으로 그려 수많은 직장인들의 밤을 지새우게 한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재미있는 것은 긴 제목이 구체적으로 지목하는 ‘현실의 김 부장들’뿐 아니라, 연차와 직함에 관계없이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드라마 속 인물에 대입해 보며 공감의 탄식을 뱉는다는 점이다. 너무 현실적이라 재미있다는 반응과, 너무 현실적이라 가슴이 아파 못 보겠다는 반응이 공존한다. 일에 한없는 기쁨과 한없는 슬픔이 공존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시청 반응까지 참으로 현실적이다.


드라마는 다양한 인물을 통해 ‘일’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을 꺼내놓는다. 누군가는 살기 위해 ‘보여주기 위한 일’을 하고, 살아남은 누군가는 그 일을 보며 ‘일하는 기분만 내는 것’이라며 비판한다. 주인공 입장에서는 이기적이고 얄미운 ‘빌런’이, 회사로부터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일잘러’라 평가받기도 한다. ‘일 다운 일’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감옥에 들어앉은 기분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로 그곳에 출근한다는 사실이 어떤 일보다 중요한 사람도 있다. 회사와 자신을 동기화해 생각하는 사람도, 회사원은 그저 돈 받는 만큼 일하면 된다며 선 긋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김 부장은 아니지만 누구나 ‘김 부장 이야기’에 이입하는 것은, 저마다 상황에 따라 일을 대하는 관점을 다르게 선택해야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입장이 달라지며 한순간에 별것 아닌 것이 되기도 하고, 어제까지 남의 일로 여겼던 것이 하루아침에 내 발등의 불이 되기도 한다. 오래 지켜온 신념이나 태도를 의심해야 할 때도 있다. 모든 때에 통하는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드라마 속 대사처럼 ‘회사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며 뒤늦은 좌절을 하지 않기 위해 변하는 시대와 상황에 맞춰 나 또한 달라지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그러나 변화가 당연할수록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와 권한 밖의 일들로 가득한 직장 생활에서, 흔들릴지언정 내가 지킬 수 있는 한 가지는 내가 일을 대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일을 하는 이유, 내가 세운 원칙, 내가 믿는 가치를 좇는 마음은 좌절의 순간 나의 뒤를 지킨다.

겉모습이 같은 붕어빵의 이름을 ‘팥붕’, 혹은 ‘슈붕’으로 결정짓는 것은 속에 어떤 앙금이 들어있느냐다. 내가 김 부장이든, 송 과장이든, 권 사원이든, 일하는 사람으로서 내 이름을 결정짓는 것은 이러나저러나 똑같은 직장인이라는 틀이 아니라 내가 일에 담는 나만의 앙금이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현실 속에서 생각한다. 오늘 일터에서 내가 붙잡으려 했던 가치는 무엇인가. 나를 나로 만드는 소소한 선택들은 어떤 것인가. 내 일의 팥은 무엇인가.




| 디카페인 커피챗

퇴근 후에도 퇴근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고민 이야기. 일하는 우리들의 달고 쓴 천일야화.





이 글은 2025년 9월 20일 자 한국경제신문 'MZ 톡톡'에도 실렸습니다.




사진/ JTBC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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