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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바이킹 Sep 01. 2016

자소설을 시작하는 당신에게

08/  자기소개서를 쓰기 전 생각해 볼 열 가지 이야기



나 다운 거..? 나 다운 게 뭔데..?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



90년대 하이틴 드라마 대사가 아니다.

하얀 바탕에 하염없이 꿈뻑이는 마우스 커서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취준생, 너와 나의 이야기다.

학교를 다 다닐 때까지 나 다운 게 뭔지 알 기회도 별로 없었구만 갑자기 자기소개를 하란다. 그것도 천 글자도 넘게! 페이스북 프로필 란에는 빼곡히 취미, 좋아하는 음악, 영화, 책 등등이 적혀 있지만 정작 새로운 동아리 모임이나 스터디에 나가 자기소개를 하라 하면 간신히 이름과 나이 정도를 말한 후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마는 것이 끝이다. 근데 자기소개'서' 씩이나 써야 한다니, 후와오.. 땅이 꺼진다. 자, 이 소설을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요구가 많은 소개팅



소개팅에 나갔다. 상대는 일단 외모가 멋지다. 능력도 있어 보이고, 성격도 왠지 좋을 것 같다. 오, 잘 보여야지.

어디 한번 어필을 해볼까, 하고 입을 떼려는데 잠깐! 하고 상대가 나의 말을 가로챈다.


지금부터 저한테 자기소개를 하시는데요, 다 합쳐서 절대 1600자를 넘으면 안 되구요, 맞춤법이나 발음은 아주 정확해야 돼요. 일단 본인의 장점과 단점을 명확하게 말씀해 보시구요, 살면서 본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나 사람에 대해서도 간단히 듣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앞으로 얼마나, 어떻게 구체적으로 잘할 건지 단기와 장기 계획으로 나누어 설명하세요. 아, 참고로 얘기가 뻔하다 싶으면 중간에 그냥 나가버릴 겁니다. 지금 당신 말고도 만나 달라는 사람이 수두룩 빽빽하거든요.


아씨.. 뭐 이런 거지 같은 소개팅이 다 있어!



두 번째 초년생



오늘은 평소와는 약간 다른 이야기다. 그동안 주로 '이직'에 대한 생각을 썼다면 오늘은 자기소개서, 말하자면 '취직'에 관한 이야기니까.

직장생활 7년 차, 아직 누군가에게 주제넘은 조언을 건넬 만큼 충분한 회사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최근 신입사원 서류 전형에 평가자로 참여하며 들었던 생각, 약간의 직업병, 그리고 무엇보다 전혀 다른 두 분야의 회사에 나를 '잘' 소개해 두 번의 신입사원을 거친 경험이 이제 갓 학생을 졸업하려는 이들에겐 필요한 이야기일 수 있겠다 싶어서다. 적어도, 그들이 지금부터 써야 하는 '자소설'에 머리말만큼의 보탬이나마 되길 바라며.






1/

그놈의 '어릴 때부터'


안다. 왜 자꾸 엄하신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를 찾게 되는지. 생판 남에게 다짜고짜 내 성격을 말하라는데, 사실 어릴 때부터 이래 저래서 요런 인간이 형성되었다고 쓰는 게 제일 편하다. 어릴 적 이야기는 죄가 없다. 정형화된 이야기 구조가 문제다.


정말, 정말로 이십 년 넘는 세월을 살아온 내 이야기를 하는 데 출발점이 그것밖엔 없을까? 나에게 돈을 주고 일을 시켜도 될까 말까를 고민하는 상대에게?

무작정 남과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애쓰라는 것이 아니다. 소설을 쓰더라도, 대하소설이 아닌 사건 중심의 소설을 쓰라는 것이다. 상대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정말 내가 우리 집 몇째 딸인지가 궁금할까?


기억하자. 우리의 소개팅 상대는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인내심도 없다. 보통 '성격'에 대한 부분은 자기소개서의 앞부분에 나오는데, 뒤에 아무리 매력적인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초반에 그가 나를 '그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리면 나의 멋들어진 후속편은 읽힐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2/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엄하신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이야기가 갖는 문제점은 또 있다. 일단 '연대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 후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늘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때 이런 일이 있었고, 중학생 때는 저런 일이 있었고, 고등학생 때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애가 탄다. 그래서, 대체 당신은 어떤 사람이라는 거지요?


사실 이런 일은, '성장 과정'을 통해 당신의 이야기를 해 보라'는 질문에 착실히 답하느라 생긴다. 하지만 과정이라고 해서 그것이 나의 연대기일 필요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필요한 사건 정도면 된다. 포인트가 있는 자기소개를 하자. 내가 이 글을 통해 말하고 싶은 포인트를 정하고, 그것이 전달될 수 있기를 바라며 쓰자. 모든 것을 늘어놓지 말자. 내가 내 자기소개를 읽고 나서,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라는 질문에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지를 체크해 보자.


간혹 자신의 '대외활동 연보'를 펼쳐놓는 지원자가 있다. 대외활동이야 많아서 나쁠 건 없겠지만 역시 하고자 하는 말과 관련 없는 활동들을 나열하느라 포인트를 잃으면 안 된다. 정 어필하고 싶은 활동이 많다면, 따로 이력을 입력하는 란을 활용하거나 사례에 녹여 자연스레 얘기하는 것이 좋다.



3/

'양심 고백' 하지 말자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자기소개서를 통해 소위 '고해성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는 성격이 매우 소심합니다. 주변 사람의 평가에도 무척이나 예민해서, 사람들과 크게 다퉈 동아리 행사를 망친 적도 있습니다.'
'저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결정을 내릴 때도 언제나 제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자주 욕을 먹습니다.'


단점 쓰기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

성격의 단점을 쓰랬다고 '이 기회를 빌어' 양심 고백을 해버리면 어쩌나. 마치 나는 이렇게 심한 단점이 있는 사람이니 뽑지 마세요, 하는 것과 같다.

자기소개서에서 단점을 쓸 때는, 단점인 척하며 결국 장점을 말하는 것이 요령이다. '저는 지나치게 꼼꼼해서 때로는 쉬엄쉬엄 하라는 조언을 듣는다'던지 '완벽주의자라 때로는 스트레스를 받지만 운동 등으로 극복하려 노력한다'던지.


네거티브엔 반드시 그것을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의 포지티브가 동반되어야 한다. 단점을 썼으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나 사례가 꼭 따라와야 한다는 얘기다. 다만, 개연성은 있어야 한다. 일일 연속극을 보더라도 전개에 앞뒤가 안 맞으면 화가 나는데, 하물며 한 사람의 인생에서 단점이 드라마틱하게 개선되는 데에는 납득할 만한 계기가 필요하다.



4/

함께, 그리고 앞장서서


회사에서 요구하는 자기소개서란 어떤 면에서 퍽 치사해서, 지원자에게 본인만의 특별함을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획일적인 '좋은 인재'에 대한 기준을 깔고 있다. 열정, 리더십, 창의력, 협동심 같은 것들. 사실 지금 내가 들어가려는 곳이 어쨌든 '회사'라는 공통 성격의 집단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은 곳. 좋든 싫든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의견의 테트리스를 쌓아 가며 일해야 하는 곳.


그렇기에 자기소개서에서 요구하는 어려움 극복 사례는 '함께', 그리고 '앞장서서' 해낸 것일수록 좋다.

단순히 '내가 예전엔 이걸 못했는데, 열심히 노력했더니 잘 하게 되었다' 류의 것보다는, '모두가 이런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내가 앞장서 이런 이런 일을 했고 우리는 마침내 해낼 수 있었다' 류의 스토리가 유리하다. 읽는 이는 앞서 말한 기준을 염두에 두고 읽을 것이고, 쓰는 나는 문제에 아무 답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을 겨냥해서 쓰는 것이다.



5/

좋은 아이디어와 재미있는 아이디어는 다르다


Q. 우리 회사에 왜 들어오려고 하나요?
A. 구여친이 절 무시해서요.
Q. 회사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요?
A. 우리 교회 목사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실제 상황이다. 정말 저런 답변들이 있다. 그냥 장난하려고 한번 써본 지원서라면 상관없지만, 정말 진심으로 합격을 위해 '튀어보려고' 쓴 거라면 많이 난감하다. 맥락 없이 튀려고만 하면, 튕겨나간다.


좋은 아이디어와 재미있는 아이디어는 다르다. 재미있게 썼다고 해서, 꼭 좋은 글은 아니다. 상황과 목적에 맞아야 한다. 특히나 하루 종일 튀는 것들을 보고 듣고 고민하는 것이 직업인 광고 회사에서는, 실무 경험이 없는 학생이 일부러 '히뜩하려고' 애쓰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올 수 있다.


'저는 남들과 다릅니다.'가 아니라 '제 색깔은 이렇습니다.' 하고 말해 보자. 최선을 다해 내가 되자. 그러면 튈 수 있다.



6/

학점은 정말 필요 없을까


서류전형에서 학점을 보나요? 네, 봅니다. 정말로 모든 회사에서 학점이 당락의 기준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당신이 써 놓은 학점을 '눈으로 본다'는 것이다. 자격증이나 대외 활동은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보여주기 위해 애쓰면서, 왜 학점은 보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가? 학점은 중요하다. 정확히 말하면 학점'도' 다른 것만큼 중요하다. 그것은 학점이 당신이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척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의 기본은, 성실함이다. 학생 때와는 달리 시험도, 방학도, 그리고 정해진 끝도 없는 것이 직장생활이다. 그 무한한 하루하루를 살아내려면 성실함이라는 아주 단단한 뿌리가 필요하다. 회사가 학벌은 안 봐도 학점은 보는 이유가 그것이다. 만일 내 학점이 엉망이라면? 그렇다면 그를 상쇄할 만한, 납득이 되는 경험을 제시하는 것이 좋다. 내가 학교 공부는 아니지만, 어딘가에 최선을 다해 성실히 몰두했었다는 경험.


학점은 점수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실의 증거로서 중요한 것이다.



7/

이유 없는 찬양은 금물


근거 없는 사과가 개운치 않은 것처럼, 이유 없는 칭찬은 불편하다.

이 회사가 내 어릴 때부터의 '드림 컴퍼니'였다는 믿거나 말거나를 넘어 무조건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는 '갑툭튀' 찬양은 글쓴이의 신뢰도에 영향을 미친다. 읽는 사람이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그저 자신 없어 보인다. 표정과 목소리가 없어도, 아첨과 진심은 쉽게 구분된다. 회사 듣기 좋은 말은, 면접 때 하자. 물론, 사람 봐 가면서.


이유 없는 찬양보다 더 좋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이유 없는 패기다.

내가 보았던 서류 중에 우리 회사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그 회사가 뭐 별건가요?" 하는 경우가 있었다. 본인의 주체할 수 없는 패기를 어필하고 싶었던 마음은 이해하지만 어떤 타당한 수습 없이 빡! 지르고 마는 것은 '바로 그 회사'에 다니는 독자에겐 황당한 챌린지일 뿐이다. '패기'와 '네거티브'는 구분되어야 한다.



8/

사례, 사례, 사례.


아무리 훌륭한 이야길 잔뜩 했더라도 그것을 상대방이 믿을 수 없다면 낭패다. 이것이 사례 붙이기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유다. 특히 리더십이나 적극성 같은 소위 '스펙'란에 기재할 수 없는 나만의 장점을 어필했다면, 더더군다나 그것을 증명할 사례는 단 한 줄이라도 꼭 필요하다.


사례는 '내 이야기'에 '남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다. 앞서 여러 항목에서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적절한 사례는, 그 어떤 주장도 뒷받침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이유가 된다.



9/

열심히만 하면 뭘 해!


열심히만 하면 뭘 해? 잘해야지. 라는 말을 많이 한다.

회사에 들어가면 어느 정도 맞는 얘기다. 잘 하는 놈이 잘 된다. 근데, 그 잘 하는 걸 보여줄 수 있으려면 일단 우리는 지금 이 자기소개서를 정말 열심히 써야 한다.


제 이야기는 '평의하지' 않습니다.
차마 '그럴 수강ㅇ벗었던' 저는,


서류를 보는데 입이 바짝바짝 탔다. 안타까움을 넘어 속상할 지경이었다.

오타, 왜 안 봤을까. 내기 전에 인터넷 맞춤법 검사기 한 번만 돌리면 되는데.

왜 에세이 분량은 뚝 잘라 반만 썼을까. 분명 최소 몇 자라고 적혀 있는데.

다른 회사 이름이 들어가 있네. 한 번이라도 좀 읽어보고 내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원하는 만큼 집중해야 한다. 열심히만 하면, 일단 뭘 해볼 수는 있다. 왜 저렇게 별 것 아닌 것들로 내 소중한 이야기에 상처를 내나.

똑같은 내용인데 오타와 비문이 난무하는 글과 열과 성을 다해 몇 번이고 다듬고 매만진 티가 나는 글 중, 당신이라면 어느 쪽에 마음이 가겠는가?


자기소개서는,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처음이자 유일무이한 기회다. 면접? 내 서류가 제대로 읽히기도 전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버려지면 다음은 없다.



10/

기본은, 기본이다


맞춤법과 분량 지키기 같은, 기본은 정말 중요하다. 수백수천 개의 지원서 중에서, 잘 된 것을 골라내는 일보다 기본이 충족되지 않은 것들을 걸러내는 게 더 쉽다. 실제로 많은 서류를 보다 보면 자연히 그러한 순서로 일을 하게 된다.


시간 내에 제출하고, 오타 잘 보고, 글자 수 지키자. 빠진 내용은 없는지 두 번 보고, 뒤집어 보고, 거꾸로 보자. 이것들은 말하자면 지원자와 회사 간의 약속이다. 이 사람이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까지도 은연중에 드러난다. 내 금과옥조 같은 지원서가 그깟 글자 수 때문에, 그깟 오타 때문에 꼬투리가 잡혀야 쓰겠는가. 괜히 시간 5분 넘겨 제출해서 전화통 붙잡고 울지 말자. 아무도 구제해주지 않는다.


기본을 지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기본이다.





나를 잊지 말아요


나를 뽑아 달라며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나는 말하자면 을의 입장이다. 상대방에게 잘 보이고 싶다.

그래서 '상대가 좋아할 것 같은 이야기'에 잔뜩 신경을 쓴다. 그러나 그렇게 쓴 이야기는 반드시 꼬인다. 일관성이 떨어지고, 결과적으로는 매력도 떨어진다. 왜 연애도 그렇지 않은가. 나의 매력을 어필하기보다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에만 급급하다면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설령 결혼에 골인하더라도 곧 '변했어!'라는 말이 나온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나를 힘차게 믿자. '내가 뭘 갖춰야 하지?'보다는 '내가 뭘 가지고 있지?'를 묻자. 시간에 쫓겨 무턱대고 달리지 말고 내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먼저 가만히 들여다보자. 내가 가지고 있는 나만의 무기를 믿자. 설령 '나 다운 게 뭔데!!!'하고 소리 지르고 싶을 때조차 분명 나 다운 건 있다고 믿자. 그것이 세상 그 무엇보다 날카롭고 강하다고 믿자. 그리고, 최선을 다해 나를 쓰자.





| 신입 영업사원, 신입 카피라이터로 두 번 입사한 7년 차 직장인. 여전히 변비 같은 진로 고민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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