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왜 가르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걸까
#1
내 그림일기가 어쩌다 한 포털사이트 메인에 잠시 걸렸다. 처음엔 좋았다. 콘텐츠의 내용보다 어디에 걸리느냐가 더 중요한 세상이니까. 그런데, 그 짧은 단상에 연예면 기사 댓글란에서나 보았을 법한 악플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굳이 가던 길을 멈추고,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을 신기할 만큼 상상도 못 한 방향으로 해석하고는 나를 가르치고 혼냈다.
'그걸 그렇게 생각하다니 니가 이상한 놈이다'
'이런 데서 쓸데없이 감성폭발하지 말고 차라리 굶어라'
'네 태도는 우습고 예의가 없다'
아, 이래서 일기는 일기장에 쓰라는 건가.
#2
유명 웹툰 플랫폼에 생활툰을 그리는 지인이 있다. 장르의 특성상 본인의 일상이 많은 부분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평소 옷에 관심이 많고 그것을 예쁘게 그려내는 재주가 있는 그녀의 만화에 '남편은 저런 밥 주면서 자기 옷은 좋은 걸 사 입고 있다'는 댓글이 달린 것을 보고 난 충격을 받았다. 지인의 SNS에 올라온 '실사'도 아니고, 생판 남이 그린 만화 캐릭터가 먹고 입은 것을 가지고 '저 집 밥상은 후줄근하군, 저 옷은 어디어디 브랜드 꺼잖아?' 하고 뜯어보았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심지어 서글퍼졌다. 물론, 해당 회의 내용은 옷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들은 만화를 평가하는 걸까, 타인의 삶을 평가하는 걸까?
#3
초등학생 시절, ‘말싸움 하기’가 또래의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아니, '말싸움 걸기'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 같다. 매일 조금씩 누군가의 ‘깔 거리’를 모아 두었다가, 이때다! 싶을 때 어깨에 뽕을 잔뜩 넣고 척 척 걸어가 '야! 너 나 좀 보자!' 하고 주위의 모든 아이들이 다 들을 만큼 큰 소리로 따지는 것이다. 잠시나마 나의 큰소리에 '쪼는' 상대를 보며, 꼬마들은 마치 자신이 정의의 사도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부정적 쾌감의 무서움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나는 저 녀석에게 꼭 한마디 해줘야겠어!' 하는 출처 불명의 정의감에 활활 불탔다. 아마 '왜? 그 녀석이 너에게 뭘 어쨌는데?' 하고 묻는다면 아무 말 하지 못했을 테지만.
2016년, 이 비뚤어진 자존감은 과연 초등학생만의 문제인 걸까?
분명 인테리어 관련 기사인데 '애 낳으면 어쩌려고 저렇게 하고 사냐'며 혀를 차는 댓글.
고민을 털어놓는 후배에게 '니가 아직 몰라서 그러는데,' 나무라듯 말하는 선배.
청첩장을 들고 한참을 고민하다 연락한 친구에게 '너 그러는 거 아니라며' 혼내는 동창.
상담을 받으러 갔더니 느닷없이 '상담하는 말투'에 상담을 시작하는 상담사.
자기가 문을 잡아 주고선 뒷사람에게 '저기요, 인사는 하셔야죠?' 성질내는 낯선 사람.
눈이 아파 안과에 온 환자에게 '요즘 그 정도 눈 피곤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냐'며 굳이 한마디 보태는 의사.
한 조각의 정보를 쥐고선 타인의 전부를 평가하고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
왜 그렇게 온 사방에 참지 못하고 분노의 훈계를 하느라 바쁜 걸까?
대체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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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offense
사람들이 화났다. '일단 화내기'이라는 새로운 인사법이라도 생겨난 것 같다. 도무지 '선빵'을 날리지 않고서는 소통이라는 것을 할 수 없다는 듯, 마치 유행처럼 문득 싸움을 걸고 잔뜩 날을 세운다. 일단 시작된 싸움은 누군가 질 때까지가 아니라, 누군가 그만 싸우고 싶을 때까지 계속된다. 비난과 비판, 딴지와 의견이 마구 뒤섞인 세상 공기에 매 순간 피곤해! 피곤해! 기침이 나온다.
어쩌다 '그것은 이것과 상관없지 않냐'며 참고 듣던 이가 되받아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그는 ‘X선비’, ‘진지충’이 된다. "웃자고 한 말인데 죽자고 달려든다" 혹은 "난 저 좋으라고 한 말인데" 하며 그들의 '딴지'에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사람을 융통성 없는 바보로 만든다. 본질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이 난장에, 피융- 설득력은 없고 공격력만 탑재한 오지랖의 화살이 날아다닌다.
No offense(기분 상하진 말고), 뒤에 숨어 오늘도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빙자한 훈계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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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녁은 온 세상, 아무 데나 맞아라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속담이 있다. 요즘의 인터넷 댓글 양상이 꼭 그렇다.
어느 날 나는 생각보다 내가 '일베 용어'를 꽤 많이 안다는 것에 놀란 적이 있는데, 그것은 슬프게도 포털 사이트의 댓글란을 습관처럼 열심히 들여다본 덕분(?)이었다.
인터넷 댓글창이란 본디 어떤 주제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하기 위한 공간이다. 헌데 이상하게도 지금 그곳은 누가누가 더 대단한 지식과 센스 있는 말발을 가졌는가를 두고 자유롭게 싸우는(!) 공간이 되었다. 문제는 그것이 어떤 내용의 기사인가는 상관없이, 결국에는 몇 가지 ‘싸우기 좋은’ 주제로 귀결된다는 데 있다. 다들 어디서 크게 한 대 맞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저마다 씩씩대며 오늘치의 분노를 꺼내 들고 이곳저곳에 던지고 쏘고 날리는 것이다.
'이건 네가 못생기고 뚱뚱한 탓이다!'
'저건 네가 잉여에 생각도 없는 모지리인 탓이다!'
'이런 것도 모르고 댓글을 달다니, 너의 인생은 참 쓸데없군!'
말해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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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보단 낫다는 기분: 만(慢)의 번뇌
수도자이자 작가인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의 '생각 버리기 연습'이나 '번뇌 리셋' 등의 책을 보면, 이런 현상은 우리가 가진 '만(慢)의 번뇌'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만의 번뇌란, 자신이 좋게 평가받고 싶다고 걱정하며 본인의 주가가 깎일까 봐 조바심 내는 욕구 중 하나로, 일종의 자기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다.
- 상대가 가볍게 한마디만 해도 극도로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며 자기변명을 늘어놓는다거나
- 본인이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기 위해 맘에도 없는 공감, 혹은 사과를 한다거나
- 위로받으려는 상대에게 오히려 훈계를 늘어놓음으로써 본인의 '더 나은 위치'에 위안 삼거나
하는, 어떤 면에서는 '피해 의식'에서 나오는 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법륜 스님은 '피해 의식은 자신을 보호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나를 '길가에 핀 풀 한 포기와 같다'고 생각하면 세상에 상처받을 것이 없는데, 내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자기 이미지에 과하게 집착함으로써 결국에는 가장 특별하지 못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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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없는 교실
대학 시절, 나의 전공과목엔 발표와 토론 위주의 수업이 많았다. "그럼, 선배님 이름도 뺄~께요!" 하는 광고의 히트가 말해주듯, 그때나 지금이나 대학생의 팀플 과제란 목마른 몇몇이 울며 겨자먹기로 파는 우물 같은 거였다. 다른 팀원이 열심히 준비한 발표를 심드렁히 흘리던 교실 분위기는, 그러나 질문 시간이 되면 사뭇 달라졌다.
교수님이 질문 있나? 할 때는 쥐 죽은 듯 조용하던 교실이 팀플 과제에 대한 질문 시간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어 가시 돋친 말투로 ‘공격’을 개시했다. 도대체 저 질문을 지금 여기서 왜 하는 걸까 싶은, 발표의 논지에서 크게 벗어난, 질문을 위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영화 '족구왕'에 이런 모습을 패러디한 장면이 있다).
그것이 '참여 점수'를 보겠다며 펜을 들고 삐딱하게 앉아계시는 교수님을 향한 것이었는지, '나도 이 정도면 이 수업에 아주 큰 기여를 하고 있지, 암!' 하는 만의 번뇌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확실한 것은, 비난과 비판을 구분하지 못했던 그 교실에 '다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럼 사회는, 회사는, 뭔가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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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그럴 리가! 우리는 모두, 회사에서 상대의 의견과(특히 상사의 의견과) 반대되는 생각을 말했을 때, 상대가 갑자기 상처받거나 반대로 나에게 격노하는(!)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그리고 나서, 상대는(상사는!) 굉장히 많은 '내 말은 맞고 네 말이 틀린 이유'를 장황히 늘어놓는데, 사실 그의 말을 차 떼고 포 떼고 정리해보면 결국 이 한마디라 할 수 있겠다. 야이씨 내 말에 토 달지 마!
그냥 다른 '의견'을 제시했을 뿐인데, 그것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생각해서 낸 의견인데, 어떻게 네가 나한테 감히?'
상대가 쉽게 감정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결국 맘에도 없는 동의를 하는 순간이 쌓이고, 그 작은 스트레스들은 오지랖, 분노, 훈계, 피해의식 등의 폭탄이 되어 엄한 곳에서 펑 펑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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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의 의견’을 분리하는 일
얼마 전 회사 상사 중 한 분이, 재미있는 말씀을 했다. 과거 컴퓨터가 없었던 시절, 광고 회사에서의 프리젠테이션은 모두 인쇄물을 붙인 '보드'를 이용해서 했는데, 그분의 상사가 당시 신입사원이었던 그에게 "보드를 절대 네 몸 앞에 들지 말고, 약간 옆으로 비껴 들어라"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니 왜요?
그 이유는 이렇다. 보드를 내 몸 앞에 들고 발표를 하면 클라이언트가 하는 모든 비난의 화살이 나한테 와서 꽂힌다. 왠지 열심히 노력한 나를 까는 것만 같아 자꾸만 방어적인 말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보드를 옆으로 들면? 그때부터 그 보드에 적힌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의 의견'이 된다. '나'와 '나의 의견'이 분리되는 것이다. 클라이언트가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은 나의 의견에 대한 '다른 의견'일 뿐이지, 결코 나를 욕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방어적인 말로 논점을 흐릴 필요도, 필요 이상으로 자존감에 상처를 입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만 더 해봐,
그냥 확 가르쳐버린다!
사실 지금까지 지칭한 '그들'은 나 자신이고, 어쩌면 당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뭐 우리에게도 이유는 많다. 세상이 팍팍해서, 나란 존재는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만의 번뇌가 뻗쳐서 등등. 쉽게 말하면 '못살겠어서' 그렇다.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는 단 1초도 손해보지 않고 살기가 너무 힘든 세상이라서.
하지만, 그렇게 뾰족한 가시를 아득바득 갈고 있는 동안 우린 스스로를 그 누구도 안아주지 못하고 그 누구에게도 안길 수 없는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앞서 말한 보드 이야기가, 단지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쉬운 예라고 생각한다. 요즘 따라 누군가가 자꾸만 나를 무시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면, 그래서 누구에게라도 한 수 가르쳐 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면, '나의 생각'을 잠시 내 옆에 들고 가만히 지켜보는 건 어떨까? 과연 세상이 반대하는 것이 나인지, 별 것 아닌 나의 의견일 뿐인지. '멋진 나'에 대한 집착은 일단 최대한 내려 두고서.
그리고, 지금 이 글보다는 앞서 소개한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의 책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함께 수양하는 마음으로. 언젠가 서로에게 근사한 깨달음보다는 따뜻한 가슴을 내어 줄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라며.
| 신입 영업사원, 신입 카피라이터로 두 번 입사한 7년 차 직장인. 여전히 변비 같은 진로 고민 진행 중.
| cover photo/ 단원 김홍도, '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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