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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바이킹 Sep 19. 2016

여기가 아닌 어딘가는, 어디에도 없을지 모른다

10/  그만두고 싶은가, 시작하고 싶은가



일반적인 회사엔 크게 두 가지 종류의 부서가 있다. 돈을 버는 부서와, 돈을 쓰는 부서. 돈을 버는 부서란 간단히 말해 영업 현장에서 회사의 매출을 올리는 일을 하는 곳이고, 돈을 쓰는 부서는 그것을 마케팅 활동에 투자하고 인력, 재무 등을 관리하며 회사를 경영하는 일을 하는 곳이다.


갑자기 무슨 회사 전문가라도 되신 양 이런 재미없는 얘기로 글문을 연 이유는, 내가 '이직을 결심했던 계기'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다. 스물다섯, 나는 돈을 버는 부서에 입사했다.




/

성격과 본질의 차이


"네! 저는 회사의 최전방에서, 회사의 대표 선수로 일하는 것이 좋습니다!"


멋도 모르고 영업직에, 그것도 그 빡쎄다는 소비재 유통업에 발을 뻗으며 나는 이렇게 큰소리쳤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헌데, 나의 저 허세는 사실 95%쯤 진심이었다. 영업? 사람 만나는 일 아냐? 나보다 나이도 한참 많을 테고 성격도 한참은 더 셀 아주머니, 아저씨들과 침, 눈물 튀겨가며 복닥복닥 일하는 거 아냐? ...쯤의 낭만을 가졌던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난 뭐 할 때 행복할까'를 고민하던 취준생은, 사람이라는 키워드 하나만으로 영업이라는 직업과 나를 맘대로 엮고는 그것을 찰떡같이 믿어버렸다.


모두가 예상할 수 있을 만큼의 희로애락을 지나고, 깨달았다. 영업은 과연 최전방 보병이 맞았다. 그런데, 그것은 영업이라는 직업의 '성격'이지 '본질'은 아니었다. 영업의 본질은, 돈을 버는 것. 말하자면 비즈니스였다.



/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


나는 내가 회사에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인 게 싫었다. 무슨 소리? 회사원이 그럼 회사 돈을 벌지 자기 돈을 버나? 맞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코어(core)'가 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 동료 중에는 영업에 걸맞게 철저히 '결과 지향'적인 친구들이 많았다. 대부분 대학에서부터 경영을 공부한 그들에게는 매달 따박따박 나오는 실적이 곧 강한 동기가 되었고, 현장에서 일을 열심히 배워 나중에는 컨설팅 회사로 옮기거나 자기 사업을 꾸리겠다는 멋진 꿈도 꾸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내겐 그 결과를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들이 훨씬 더 내 것 같았다. 나를 쳐다도 안 보는 바이어를 설득하기 위해 가슴에 빵꾸가 나게 고민하던 시간들이라던가, 하루에도 수십 건씩 터져 나오는 이슈들을 핸들하면서 사람들과 밀도 높은 소통을 해야 하는 것이라든가, 매장 여사님들의 고맙다는 한 마디에 나도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는 인간이구나, 느낀 순간이라던가.

나에게는, 내가 '무엇을 얻기 위해 일하는지'보다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가 훨씬 더 중요했다.


보기 참 멋지고 벗기 아쉽지만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

한 땀 한 땀 처음부터 재단해야 하지만 내게 꼭 맞을 옷.


나는 선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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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미치겠는가


퇴사 면담을 하면서 나를 이래 저래 회유하려는 상사에게 나는 말했다. 나도 내가 여기 남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말하는 이곳의 장점들에 이젠 내가 더 익숙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결정이 바로 여기 남는 거예요. 그런데, 이곳엔 내가 지금 가슴이 타도록 하고 싶은 '그 일'이 없어요.


사실 퇴사를 고민할 때 수만 번 쏟아지는 '그래서 뭐할 건데?'라는 질문에 대해 반드시 멋들어진 대답을 내놓을 필요는 없다. 죽을 것 같으면, 죽기 전에 때려치는 게 맞다. 남이 아닌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나만의 이유가 있으면 된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보자. 나는 지금 무언가를 그만두고 싶어 미치겠는가, 아니면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 미치겠는가.


'나는 내가 일을 하며 가장 충만하다고 느꼈던 그 순간들이 바로 본질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고 마침내 자가 진단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은, 내 일의 어떤 부분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그 부분이 해결되려면 어떤 변화를 주어야 할지 고민의 주름이 닳도록 만지고 다듬고 탈탈 털어 본 후였다.

여전히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었다. 다만, 그들에게 돈이 아닌 공감을 얻는 사람이고 싶었다.



/

여기가 아닌 어딘가


일본 소주 '니카이도'의 인쇄 광고 시리즈를 하나 소개한다. 오늘의 이야기와 꼭 맞닿아 있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와, 어떻게 이런 걸 소주 광고에 쓸 생각을 했지?' 싶어 참 좋아하고, 부러워하는 광고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라고 말하는 자신의 '어딘가'는 어디에도 없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폐부를 찌른다. 우리는 혹 무의식 중에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좋겠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게 꼭 맞는 어딘가야 뭐 어딘가에 있겠지'하는 편한 생각으로 오늘의 고민 또한 어딘가로 미루고 있는 건 아닌지.


흔히 '하고 싶은 게 없어서' 혹은 '배운 풍월이 이것뿐이라' 그 어딘가에 가지 못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나는 그게 왜 나쁜 건지 묻고 싶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총천연색 환상을 품고 끝없이 어딘가, 어딘가에 핑계를 주는 쪽보다는,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당신이 백 번 낫다.



'좀 더 내게 맞는 일을 하고 싶어'라고 말하면서, 별로 하고 싶은 일 따위 없는 자신을 깨닫게 되곤 한다



/

이직은 목적이 아니다


오늘 당장, 하루빨리, 여기가 어딘 어딘가로 가고 싶다면 스스로의 마음에 한번 물어보자. 그 '어딘가'가 혹시 '아무 데나'는 아닌지.


이직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직은 잘 고민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어야만 한다. 내가 무언갈 해보고 싶어 미치겠을 때, 이직에 대한 확신은 찾아온다. 그것이 설사 '백수가 되고 싶어 미치겠어!' 라도 상관없다. 만일 지금 원하는 것이 '좀 더..' 혹은 '어딘가..' 와 같이 애매하다면, 내 고민엔 시간이 더 필요하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합니다. 내 고민을 참을성 있게 꼭꼭 씹어 보아요.
세상은 날 기다려주지 않지만, 딱히 나를 재촉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 신입 영업사원, 신입 카피라이터로 두 번 입사한 7년 차 직장인. 여전히 변비 같은 진로 고민 진행 중.


| cover & body photos/ 일본 소주 '니카이도' 인쇄 광고 (이미지 출처: 네이버 '바니걸'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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