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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바이킹 Oct 03. 2016

저녁이 생기던 날

11/  직장인, 하루를 쪼개다



나는 혼술이 좋다.
혼술은 내 상처를 치유해주는 치료제이기도 하며 내 슬픔을 말없이 달래주는 친구이기도 하다. 기댈 곳 하나 없는 외로운 일상을 그나마 혼술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어 위로받는 건 아닐지. 그래서 나는, 오늘도 혼술을 한다.  - tvN 드라마 '혼술남녀' 중


격정 로맨스('또 오해영')와 풋풋 로맨스('싸우자 귀신아')가 지나간 자리, 어쩐지 매일 밤 혼자 술을 마시는 남녀의 이야기가 찾아왔다. 약간의 과장과 드라마적 설정들이 있긴 하지만, 노량진 공시촌 라이프를 현실적이고도 무겁지 않게 그려내 조용히 매니아층을 형성하는 중이다. 어느새 이 드라마는 매 회 반복되는 주인공 하석진의 대사처럼, 월요일 밤 '나만의 힐링 타임'이 되었다.


밤 11시에 방영되는 드라마로선 잔인하게도 최소한 한 회당 두 번 이상의 '혼술' 장면이 나온다. 차마 그냥 보기 힘든 고퀄리티 안주와 함께. 나는 감동받았다. 남들 시선 의식하지 않고 혼자 새우 한 접시를 굽는 쿨함, 귀에는 클래식을 꼽고 음주측정기에 숨을 호 후 불어가며 한 잔의 맥주를 마시는 별스런 취향. 무엇보다 매일 밤 반드시 혼술을 할 시간을 사수하는, 그 의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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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 살고 싶은데


퇴근 후에 뭘 한다구? 그게 가능해? 아니.. 무엇보다 '퇴근 후'라는 게 뭐지? 먹는 건가?

1년 차 어카운트 매니저 시절, 아직 잉크도 다 안 마른 면허로 매일같이 골목부터 대형 마트까지 회사 차를 몰고 다니며 정신없이 매장을 체크하고 발주를 넣고 바이어를 만나고 직원들을 교육하고 온갖 안팎 미팅을 끝내고 나면, 당연한 듯 밤이 되었다. 남들 퇴근할 시간에 회사로 기어들어가 차를 세우고, 김치찌개 한 그릇 먹고 커다란 커피 하나를 들고 자리에 앉으면 8시. 그때서야 낮에 외근을 하느라 처리하지 못한 서류업무를 시작했다. 내부 보고자료부터 거래처 미팅 자료, 각종 요청 메일 작성, 밀린 정산 서류들을 정리하고 낮에 넣은 기름 영수증에 풀을 발라 잘 붙여 두는 일까지. 그랬다. 21세기 글로벌 기업에서도, 노오란 입금증을 떼고 천 원 이천 원짜리 영수증을 붙이는 일 같은 건 어쨌거나 해야 할 일이었다. 땅에 떨어질 것 같은 무거운 어깨를 잘 주워 들고 퇴근길 라디오를 켜면 어느새 11시. 이게 졸린 건가 아픈 건가 모르겠는 멍한 몸으로 새까만 고속도로를 달려온 집에선 어느새 내일이 된 시계가 나를 아는 체 한다. 가만있자, 내일은 오전 7시 광주행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 적어도 5시엔 일어나야겠구나. 오늘은 화장도 지우지 말고 그냥 자야지. 아니, 이젠 오늘이 아닌가? 자기 전이니까 아직 오늘인가? 정말... 이게 다 뭐지..?

아, 좀 사람답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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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없으면, 앞으로도 없어


그렇게 내가 일인지 일이 나인지 모른 채 살던 어느 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삐걱삐걱 결리는 어깨를 돌리고 있는데 한 선배를 마주쳤다.

"어깨가 아픈가 보네~"

"네ㅠㅠ 온몸이 아파 죽겠어요, 어유."

"운동 같은 거 해? 그럼 좀 나을 텐데"

"아아니요오~ 해야 되는데~ 시간이 없잖아요"

나는 특별히 '없잖아요'에 힘을 주며 말했다. 뭐, 다 아시잖아요? 하는 피식거리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런데, 선배는 함께 어깨를 으쓱해 주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시간, 지금 없으면 앞으로도 없을 거야."

뭐지, 꼰대인가. 이게 뭔 거친 예언이래? 저, 진짜 시간 없거든요? 1년 차가 다 그렇지 뭐. 운동이고 뭐고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대체 어디 있담. 나도 선배만큼 적응 좀 되면 시간 낼 거거든요? 흥이에요. 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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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요가의 경이로움


얼마 지나지 않아 두툼히 쌓인 옆구리살에 바야흐로 옷장의 80%가 필요 없게 되어서야, 나는 드디어 운동할 생각을 해 냈다. 어디 한번 찾아나 볼까, 하고 검색을 해 보니, 세상에... 회사 코앞에만 헬스장이 다섯 개는 있었다. 게다가 직장인들을 위해 대부분이 24시간 오픈. 뭐야, 이 정도면 저녁에 잠깐 가서 걷고만 와도 되겠는데? 더 집중해서 찾아보았다. 당시에 유행하던 'OO일 동안'이라는 요가센터가 회사 바로 근처에 있었다. 등록.


'헐, 내가 운동을 하러 왔어'

첫날, 미친 듯이 달라붙는 '내일부터 하자' 요정을 겨우 겨우 떼어내고 끌려가듯 센터에 갔다. 우아... 정말 직장인들이 많네. 이 사람들은 안 바쁜가?

분명 너무나 힘들었던 첫 수업이 끝나고, 뭔가 다른 기분으로 고속도로를 달리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더 이상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아직 처리하지 못한 입금증도, 지금도 쌓이고 있을 이메일도, 다 붙이지 못한 영수증들도. 대신, 내 마음은 이 한 가지 생각으로 벅차올랐다.

'아, 그래.. 나도 자유의지로 뭔갈 할 수 있는 인간이었지. 맞아... 나는 병X이 아니었어..!!!!!!!'

그것은, 환희였다.


그날로부터 약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말 그대로 운동에 있어서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직장인이 되었다. 힐링 요가, 핫요가, 파워 요가, 헬스, PT, 필라테스, 스피닝, 복싱, 그리고 지금 배우고 있는 태권도까지. 안타깝게도 한 가지 아이템으로 3개월 이상 지속한 것은 없다. 그저, 어떻게든 계속 운동을 해 보려고 했을 뿐.

비로소 이전에 선배가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녀는, '시간을 내려는 습관'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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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쪼개면, 분노도 쪼개진다


하루 중, 회사 외에 내 의지로 다른 스케쥴을 만들면, 나의 하루는 그만큼 쪼개진다. 단 한 시간이라도 해야 할 일이 아닌, 오로지 내가 하고 싶은 일로 채워 넣은 또 다른 하루. 첫 요가를 하던 날 내가 느꼈던 경이로움은, '회사에서의 나'가 퇴근한다고 해서 오늘이 끝나버리지 않고 '운동하는 나'가 만든 두 번째 하루가 새로 시작된다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내 의지로 만든 시간은, 특히 직장에서 거지 같은 하루를 보냈을 때 빛을 발한다.

예를 들어, 오늘 나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떠넘긴 얄미운 상사의 경우 말이다. 깊은 분노가 뻗친다. 운동이고 뭐고 그냥 다 집어치우고 술이나 잔뜩 취하고 싶다. 그런데, 내가 오늘 그 기분을 애써 누르고 헬스장에 간다면?


이제 나의 분노는 헬스장에서 샤워 순서를 새치기한 얄미운 아주머니가 나눠 가진다!

그럼 오늘은 정말 이것도 저것도 되는 일이 없으니 더 망한 게 아니냐구? 천만에. 한 사람에 대한 깊고 구체적인 분노보다, '뭐 이리 되는 게 없어' 하는 일반적인 화가 훨씬 낫다. 내 마음이 '회사'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집중하기를 멈추고, 새로운 주제로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회사에서의 분노는 나에게 그만큼 덜 중요해진 것이다.

왜 연애도 그렇지 않나. 내 취미고 친구고 미래고 전부 버리고 이성에게 올인했다가 결국 집착으로 변하는 경우. 그래서 그 사랑이 깨지면, 나의 삶 전체가 깨져버리는 경우.

지금 내 삶에서 정말 잘 하고 싶고, 지키고 싶은 무엇이 있다면, 그럴수록 그 한 가지에만 너무 몰입하여 끌려다니기보다는 나의 삶을 보다 다양한 하루가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하자. 그래야 가장 중요한 그 하나에 더 마음 편히 집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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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 30분 비행기


오늘 저녁에 꼭 타야 할 뉴욕 행 비행기가 있다고 하자. 일은 끝날 기미가 안 보이고, 떠나야 할 시각은 다가오고... 어떻게 해야 할까? 똥줄이야 타겠지만 우리는 일단 도저히 닫을 수 없을 것 같던 컴퓨터를 닫을 것이다. 몇백만 원짜리 비행기표를 날릴 수는 없으니까.


오후 2시는 졸리다. 4시는 배고프다. 5시만 넘어도 슬슬 집중력이 다해 그만 집에 가고 싶다. 하지만 멍한 틈에 쌓여버린 일들이 맘에 걸려, 결국 저녁을 먹고 야근을 한다. 사실 그 일들 중엔 조금만 집중했으면 낮에 끝낼 수 있었던 일도, 굳이 꼭 오늘 끝내지 않아도 될 일들도 있다. 퇴근하고 싶지만, 딱히 꼭 퇴근해야 할 이유가 없어 흐르듯 야근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저녁에 꼭 가보기로 한 맛집, 회사 앞에서 기다릴 남친, 오늘 안 가면 돈 날리는 수업, 오늘 꼭 해 먹어야지! 다짐했던 요리. 우리가 스스로를 위해 만들 수 있는 작은 약속들은 무수히 많다. 그저 운동 하고 자기계발 하자는 말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해 나의 하루를 조금이라도 쓰자는 이야기다.

우리가 여행을 가면 기분이 좋은 이유는, 여행 자체의 즐거움도 있지만 사실 여행 중 먹고, 자고, 가고, 보는 모든 것이 다 '내 맘대로'라서 이기도 하다. 우리의 하루 중에도 이렇게 '내 맘대로' 만든 시간이 잠시라도 있다면, 일이, 회사가 내 삶 곳곳에 미치는 영향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늘 오늘 저녁에 타야 할 비행기가 있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최대한 그 비행기를 타고 떠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전, 회식 안합니다." 우리의 안녕을 위해 이 대사까지 따라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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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있는 삶


흔해빠진 책 제목, 혹은 흘러간 캐치프레이즈 같던 이 말이 최근 '김영란법이 바꾼 풍경'이라는 기사 제목으로 다시금 종종 등장하는 걸 보았다. 그 풍경이 최신 유행이든 아니든, 어쨌든 저녁이 있는 삶이란 것이 직장인에게 갖는 의미만큼은 유행을 타지 않을 것 같다.


이 회사에서 내가 오늘 하루만 일하고 그만둘 거라면 오늘 밤을 누구보다 하얗게 불태워도 좋다. 하지만, 그것은 회사도 나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린 둘 다, 이곳에서 내가 더 잘, 더 오래, 더 행복하게 일하길 바란다. 진짜다.

이것이 우리가 '나만의 힐링 타임', 저녁을 사수해야 하는 이유다.





| 신입 영업사원, 신입 카피라이터로 두 번 입사한 7년 차 직장인. 여전히 변비 같은 진로 고민 진행 중.


| cover & body photos/ tvN 드라마 '혼술남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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