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 소울 푸드
지금처럼 주말의 놀 거리가 다양하지 않았던 때, 일주일에 한 번 엄마 아빠 손을 한 짝씩 잡고 가까운 백화점에 가는 것은 미취학 아동이던 내게 장날만큼이나 큰 행사였다. 지금의 복합쇼핑몰처럼 뽀로로파크도, 멀티플렉스 영화관도 없던 백화점이 어찌하여 그토록 어린 가슴을 설레게 했는가? 그건 바로, 지하 1층에 위치한 푸드코트 때문이었다.
푸드코트, 아. 정말 어찌나 매혹적이었던지! 김밥도, 라면도, 짜장면도, 만두도, 닭강정도, 아이스크림도, 슬러시도, 평소에는 엄마의 빗장 수비에 막혀 자주 보기 힘든 이 모든 분/간식들이, 푸드코트에선 전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세상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떡볶이가 있었다.
그 어떤 다양한 메뉴가 눈길을 끌어도 내 선택은 늘 한결같았다. 뭐 먹을래? 떡볶이. 또야? 응. 지난주에도 먹었잖아. 응. 그럼 비빔밥 먹을까? 아니. 그럼 냉면? 아니. 대체 뭘 먹으려고! 떡볶이.
엄마 아빠가 진저리를 칠만큼 나는 오로지 떡볶이만 먹었다. 보다 못한 부모님이 푸드코트가 아닌 맨 꼭대기층 식당가에 데려간 날에도, 나는 기어이 푸드코트를 들러 떡볶이 1인분을 포장한 후에야 얌전히 젓가락을 들었다. 떡볶이가 없는 주말의 백화점은, 나는 대체 상상할 수가 없었다.
생애 최초의 눈싸움에 대한 기억이 있다. 한 동뿐이던 아파트 옆 공터-그 당시엔 이렇게 뭔지 모를 용도의 공터가 도시 여기저기에 있었다-에서 언니와 둘이 함박눈을 말아 던지며 놀았다. 그다지 보온성 좋을 것 없는 털장갑을 낀 손끝은 곧 빨개졌다. 온 바지며 외투를 다 적신 채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돌아온 집에선 엄마가 갓 구운 고구마를 호호 불고 있었다. 노오란 고구마가 놓인 작은 앉은뱅이 탁자 위에, 엄마는 지금 막 가스렌지에서 내린 커다란 후라이팬을 턱 하고 올려놓았다. 후라이팬 가득 담긴 떡볶이가 훅훅 다정한 김을 내뿜었다. 춥지? 얼른 먹어. 아직 채 익지 않은 라면사리가 빨간 국물 속에서 반딱반딱 빛났다.
생애 최초의 '배임'에 대한 기억도 있다. 별나라유치원의 시장놀이 날, 나는 떡볶이 집 사장이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지! 하필, 우리 가게 떡볶이가 짜장 떡볶이 일건 또 뭐였단 말인가. 태어나 처음 맛본 그것은 맵지도 않고 짜지도 않았다. 또한 달기도 하고 새콤하기도 했다. 그날, 별님반 떡볶이 가게 주인은 커다란 비디오카메라에 그 모습이 다 찍히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뒤돌아서서 팔던 떡볶이를 한 가닥 한 가닥씩 몽땅 집어먹었다. 장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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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먹었어 안 먹었어."
"...안 먹어떠..!"
"엄마는 안 봐도 알아. 솔직하게 말해 봐. 먹었어 안 먹었어?"
"...아안...먹어떠....!ㅠㅠ"
빨간 고추장이 선명하게 튀긴 샛노란 원피스를 입고, 나는 바락바락 우겼다. 여덟 살 난 눈꼬리에 눈물까지 달렸다. 겉으로만 화를 내는 엄마의 입꼬리가 웃음을 참느라 실룩거렸다. 망했다,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그렇게 매번 혼이 나고도, 나는 학교 앞 불량식품 가게에서 팔던 200원짜리 설탕 떡볶이를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아마 그보다는 참새가 방앗간을 더 잘 참았을 것이다. 영화 '라따뚜이' 못지않은 생쥐 셰프가 있었을지언정, '샛별문구'라는 간판을 내건 그 가게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국물 떡볶이를 팔았다. 나는 백 원짜리 두 개가 모이면, 손바닥만 한 동전 지갑에 그것을 소중히 챙겨 들고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샛별문구에 갔다. 지갑에 백 원짜리가 한 개밖에 없어도 갔다. 똑같이 백 원을 가진 친구와 팔짱을 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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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전반에 걸쳐 떡볶이에 대한 기억은, 내게 그 어떤 기억보다 구체적이고 선명한 장면들로 한 장 한 장 남아 있다. 그것이 진정 얼마나 구체적인가 하면, 이러하다.
엄마가 학교 어머니회에 오시던 날, 끝날 때까지 나가 놀으라며 준 (무려)천 원짜리 한 장으로 사먹은 학교 앞 청X상가 떡볶이. 우연히 피아노 학원 가방에서 발견한 돈을 꼭 쥐고 두근거리며 사먹었던 학원 1층의 포장마차 떡볶이.(엄마가 아파트 창문으로 내내 지켜보고 있던 줄도 모르고!) 중학교 3년 내내 하굣길마다 친구를 꼬셔 하루는 내가 하루는 니가 샀던 창X시장 떡볶이. 그 떡볶이집이 없어지자 새롭게 출근 도장을 찍었던, 버스 정류장 앞 '호X아줌마' 떡볶이. 급식 대신 급식소 공사장 먼지만 잔뜩 먹어야 했던 고3 시절, 오후 5시 50분 종례가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교복 치마를 펄럭이며 달려갔던 초X분식-여기 순대볶음에 라면사리 추가요-, 반지하에 큼큼한 냄새가 났지만 새빨간 양념에 튀김범벅이 맛있었던 희X분식 떡볶이. 늘 집 앞까지 다 와서는 일 인분을 사 갈까 말까 고민하며 몇 번이나 횡단보도를 건너게 만든 아파트 상가 앞 떡볶이.
써놓고 보니 약간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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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잔치라는 것이 있었다.
요즘에야 앵간한 패밀리 레스토랑 정도 데려가 주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지만, 그때만 해도 아이들의 생일상은 엄마들이 직접 환갑잔치상 못지않게 차려주셨다. 맛살을 넣고 집에서 싼 김밥, 초코파이를 쌓아 만든 케이크, 그때나 지금이나 환장하겠는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치킨, 달고 짠 각종 과자들, 동글동글 색색의 꿀떡. 그리고, 그날만큼은 특별히 엄마가 설탕을 넣고 달콤하게 끓여 주셨던 떡볶이 한 냄비. 내 생일상에선 이 '스뎅' 냄비가 초코파이 케이크를 제치고 늘 센터를 차지하곤 했다.
지금껏 30년이 넘게 후라이팬 가득 끓여 턱 하고 내어주시는 엄마표 떡볶이는, 말하자면 30년어치의 변주가 있다.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엄마의 떡볶이는 이것이다.
떡은 놀랍게도 흔한 원기둥 모양의 '떡볶이떡'이 아닌, 갓 뽑은 가래떡을 얇게 썬 '떡국떡'이다. 오뎅-아무래도 떡볶이 재료로서의 '어묵'은 입에 잘 붙지 않는다-은 싸구려 사각 오뎅을 대각선으로 썰어 넣는다. 넣기 전에 한 장 정도는 옆에 서서 얻어먹는다. 양배추는 서걱서걱 썰어서 최대한 많이, 마늘과 양파는 다지거나 갈아서 국물에 알아서 스며들도록. 떡볶이 본연의 맛을 위해 깻잎/소시지/햄/콩나물 등은 일절 넣지 않는다. 물론 넣은 것도 좋아한다. 라면사리는 따로 끓여 최대한 기름을 뺀 후 제일 마지막에 넣는다. 설탕 대신 물엿을 넣는다. 질척이는 양념이 좋으니까. 국물이 시큼해지므로 매실 액기스는 안 된다. 하지만 엄마는 종종 그 사실을 잊고 매실을 넣는다. 우리 딸 소화에 좋겠다는 생각이 지난 실패의 기억을 이긴다. 마지막으로, 불을 세게 해서 팔팔 끓인다. 국물이 자작자작해질 때까지.
지금은 개자식이 된 전남친은, 내게 꼭 저런 떡볶이를 해주끄마 하고 프로포즈했다. 나는 다행히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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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가 3년 차에 접어들던 즈음에서야, 나는 드디어 남은 평생 내가 나를 거둬 먹여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생존 키트를 만들었다. [고추장, 설탕, 다진 마늘, 고춧가루, 간장, 그리고 썰어서 얼려 놓은 대파.] 됐어, 이거면 그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어. 그 언제든 이젠 내 집에서 떡볶이 떨어질 일은 없어.
이 간단해 보이는 음식에 어찌나 필요한 것이 많던지! 길 가다 쉽게 사 먹는 천오백 원짜리 녹말 떡볶이와, 몇십 년째 주말마다 살짝씩 달라지는 엄마표 떡볶이에 깊고 깊은 감사를. 여러 가지 '백종원 썸띵'을 따라 해 본 결과 깨달은 것은, 하란대로 한다고 먹던 것과 같은 맛이 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커닝을 하고도 무늬만 떡볶이인 괴상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나서, 나는 생존 키트는 정말이지 비상시에만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왠지 더욱 서러워지는 맛이랄까. 엄마 집에 가야겠다. 물론 엄마가 보고 싶어서다!
어떤 대 시인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썼다는데, 이런 식이면 말 그대로 '나를 키운 건 8할이 떡볶이'다. 우리가 먹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몸을 구성한다는 걸 생각하면 뭐 사실이기도 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나는 누군가와 만나 떡볶이를 먹었던 거의 모든 날들을 기억한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떡볶이가 내 영혼의 구멍들을 치덕치덕 메꾸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떡볶이와 나, 우리는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갑자기 너무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썼다.
글.사진|작은바이킹
*커버 사진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