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바이킹 Jul 13. 2017

부장님 안 되고 싶은데

19/  성공의 온도차



"...내가 그래서, 그 눈 오는 언덕에, 생리대 수십 박스를 와장차앙!"  


와장차앙! 하는 순간 듣고 있던 신입사원 네 명의 가슴도 함께 와장창! 내려앉았다. 으악, 어뜩해!

뛰어난 실적으로 몇 년간 해외 지사에서 근무하다가 때마침 우리의 입사 시기에 귀국하신 한 부장님의 이야길 듣는 중이었다. 그가 신입 영업 사원이던 시절, 산 꼭대기 작은 슈퍼에 '신규를 뚫으러' 갔다가 매몰차게 거절을 당하고, 힘없이 돌아 나오다 그만 눈길에 미끄러져 손에 잔뜩 들고 있던 생리대들-회사 제품-을 온 사방에 나풀나풀 하얗게 뿌렸다는 이야기였다. 남산만 한 풍채로 철푸덕 넘어진 것도 그렇지만 그 시절 젊은 남자 손에 생리대라니. 전설이 들려주는 전설 같은 이야기에 잔뜩 몰입한 신입들은 순진한 토끼 네 마리처럼 귀를 잔뜩 쫑긋거리며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요? 어떻게 되었어요?


"나? 어떻게 됐긴, 이렇게 성공했지."




/

10년 후, 내 성공은 여기 있을까


이 이야기의 교훈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때의 고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너희도 젊었을 때 고생하면 나처럼 될 수 있다'? '성공하고 싶으면 오늘의 더러움을 참아라'?

전설의 부장님은 말을 이었다. 그날 그가 눈밭에 코를 박고서 실적이고 뭐고 당장 때려치워야지, 생각했던 그 순간을 참아 넘긴 것은, 자신이 평생 이런 일만 할 게 아니라는 걸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이런 하루하루를 참아서, 반드시 '좋은 날'을 보고 말리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그에게는 그날의 '에라이!'를 참고 견뎌야 할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더 이상 눈 오는 날 고생고생하며 신규 거래처를 뚫으러 다니지 않는, 보다 중요하고 보다 멋진 일을 책임지고 있을, 10년 후, 20년 후 스스로의 모습. 그것이 그날 그가 흩어진 제품들을 주섬주섬 주워 담아 묵묵히 회사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한 힘이었다.


그를 선배로서 존경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방에 있던 토끼 한 마리에겐 그 교훈이 잘 와닿지 않았다. 열심히 감화를 받으려 애써 보았지만 20년 전의 그 얼굴 시뻘게진 우직한 영업사원에게도, 존경받는 리더가 된 지금의 그에게도 딱히 감정이입이 되질 않았다. 뭐랄까, 대단한 건 알겠는데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이후로도 가끔 회사에서 잘 나간다는 사람들을 보거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해보곤 했다. 가만있어보자, 내가 한 오.. 칠..년쯤 있으면 저분들 또래가 될 텐데, 나는 저 연차에 저렇게 쾌속 승진해서, 몇백 억짜리 비즈니스를 책임지는 게 목표인가? 마음이 미동도 않는 걸 보니, 아닌 것 같았다. 지금 이 미팅에서 박수받는 저분은 틀림없이 이곳에서 굉장히 성공한 분인 게 맞는데, 왠지 10년 후 '성공한' 나는 저기에 '능력 있는 생활용품회사 부장'으로 서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담, 나는 여기에 왜 있는 거지? 이 일의 현재에도, 미래에도 되고 싶은 모습이 없으면서, 왜 이 일을 시작한 거지? 시작이야 일단 취업이란 걸 하는 게 급했으니 그랬다 치고, 이곳에서의 험난한 하루하루를 내가 앞으로도 계속 참고 견뎌야 하는 이유는 뭐지?



/

재미가 없어서


얼마 전 한 회사의 임원이, 요즘 애들의 퇴사 이유를 ‘깠다’. 젊은 사원들이 사표만 썼다 하면 그 이유가 '어처구니없게도' 재미가 없어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뭐? 재미가 없어서? 회사를 재미로 다니냐? 요즘 애들은, 하여간 근성이 없어요. 재밌는 일 하려면 나가 이놈들아!


아마 직원들의 사표에 담긴 ‘재미'의 의미는 그분이 생각한 ‘재미-fun-’가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나는 여기서의 재미란 '오늘을 투자할 이유'를 통칭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곳에서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가, 오늘의 고생이 내일의 내게도 유의미한가, 존경할 만한 리더십이 있는가 등등.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우리에게 배우는 재미, 성장하는 재미, 돈 버는 재미, 인정받는 재미, 꿈꾸는 재미, 성취하는 재미, 함께 일하는 재미, 그러니까 '일의 재미'라는 것으로 느껴지는 거라고. 아무튼.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본인이 이끌어야 할 회사가 '당연히 일에서 재미를 찾을 수 없는 곳'이라 당당하게 말하는 그 임원분께 한마디 하고 싶어졌다. 줄줄이 퇴사하는 그 회사의 '요즘 애들'은, 어쩌면 20년 후 당신처럼 될까 봐 나가는 게 아닐까요.


'무조건 내가 한 대로 참고 버텨야 나처럼 잘 될 수 있음'이라는 리더의 사고방식은 조직의 그 누구에게도 묵묵히 오늘을 인내할 동기를 북돋아 주지 못한다. 더 이상 '고생 끝에 오는 낙'을 기대하기 어려운 지금의 시대 상황 때문만이 아니라, 거기엔 '잘 된다는 것'이 모두에게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

잘 된다는 것


잘 되는 건 어떤 거지? '네고' 잘 쳐서 연차 대비 좋은 대우받기? 말 잘 듣고 고과 잘 받아서 임원 되는 것? 아닐 수도 있잖아. 왜 모두가 '지금' 회사원이라고 해서, 앞으로도 쭉 회사원으로서의 성공, 아니 이 회사 안에서의 성공을 꿈꿀 거라고 전제하는 거지? 몇 년 동안만 일을 배워서 자기 사업을 차리겠다는 목표를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뚜렷이 찾을 때까지만 돈도 벌고 사회생활도 배우겠다며 큰 욕심 없이 하루하루 책임을 다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왜 그들까지도 전부 상무가 되고, 전무가 되기 위해 오늘을 갈아 넣어야만 하는 걸까? 하물며 이 회사에서 성공하는 게 목표인 사람이라 해도, 직급 상승보다는 다양한 직무 이동이나 해외 근무 기회 등을 통해 경험의 폭을 넓히는 걸 성공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 (내가 경험한 회사를 포함하여 실제로 외국 회사들 중에는 [책임자 급 이상으로 승진하지 않고, 대신 본인의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최대한 활용하며 경험을 넓히는] 우리말로 하면 '커리어 차장' 같은 개념의 직급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전문가는, 존중받는다.)


'회사에서 임원 달기'가 잘못된 목표라는 게 아니다. 회사를 다니면 다닐수록, 몇십 년의 하루들을 꿋꿋이 투자해 몇 되지 않는 그 어려운 자리에 오른 분들은 진심 대단해 보인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조직 내 '등반'이 목표가 아닌 회사원의 하루가 무의미하다거나, 모두가 인생에서 같은 모습으로 대단해지기를 꿈꾸는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

학교는 아니지만


직장인을 '시작하는 것'만이 목표이던 때는, 직장인으로서 어떤 목표를 가질 것인가에 대해 미리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해보지도 않은 일, 가보지도 않은 곳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를 이미 갖고 있다면 더 이상하겠지. 그래서 초년생인 우리에겐 보고 배울 사람의 존재가 중요하다. 나도 꼭 저렇게 되고 싶다!는 느낌을 주는 롤모델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의 몇 년 후를 겹쳐 보았을 때 최소한 상상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는, 내가 걷고 싶은 길을 미리 걷고 있는 사람의 존재.


만화 '미생'의 강대리는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며 징징대는 부사수 장백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백기씨 동기는 스스로 성취하세요." 맞는 말이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니까. 누가 '성공하는 법'이라는 교과서를 주고, 그날 그날의 학습 목표와 우선순위도 정해 주고, 중요 부분 밑줄 쫙 돼지꼬리 땡야 해가며 가르쳐 주고, 그렇게 다 떠먹여 주고 그런 곳, 회사는 절대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회사 안에서 그 '동기'를 가장 세게 부여하는 건 최소한 대리 초년차까지는 '배울 것/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하기 위한 배울 점을, 누구에게서 발견할 것인가는 스스로의 숙제겠지만.


장백기는, '동기는 스스로 성취하라'는 선배로부터 오히려 동기를 발견했다.


장백기는 역설적으로 니 앞가림 니 알아서 하라고 말하는 강대리를 보며, 스스로의 동기를 찾았다. 자리로 돌아가 이리저리 써대던 이력서를 끄고, 다시 '그 회사'에서의 성공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기 앞가림 진짜 알아서 잘 하는' 멋진 사수 강대리에게서, 본인이 꿈꿨던 성공의 모습을 비로소 발견했기 때문이다.



직장인에게 인내란, 뚜렷한 목표가 없이도 무조건 미덕이어야 할까? 자신만의 레이더를 켜고 끊임없이 불평불만하며 '잘 되는 길'을 고민하던 현실의 장백기들이, 아무래도 내 미래는 이곳엔 없을 것 같아서, '배우는 재미가 없어서', 더 이상 참지 않고 다른 목표를 찾겠다면 그건 또 뭐가 잘못일까. 성공의 끓는점은 저마다 다르다.





| 신입 영업사원, 신입 카피라이터로 두 번 입사한 8년 차 직장인. 여전히 변비 같은 진로 고민 진행 중.






두 번째 초년생 다른 글 보기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