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주관적 현재 시점
“아니, 대체 왜 그런 회사를 때려치우고 이런 회사엘 왔어?”
다시 신입사원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게 주변을 뜨악하게 하는 재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새롭게 마주치는 사람들은 종종 이 나이 많은 신입의 정체를 궁금해했는데, 내가 나의 '과거'를 고백하는 순간 모두의 얼굴은 놀란 사다리꼴로 변했다. 거기에 내가 어떤 생각으로 직업을 바꾸었는가 까지를 덧붙이면, 이번엔 다들 세상 짠하다는 얼굴이 되어 혀를 찼다. 어쩌니, 여긴 니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닌데. 뭘 상상했든, 그 이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쯧쯔. 웰컴 투 헬.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이상하다, 이전 회사의 사람들은 모두 이런 회사를 떠나 그런 회사에 가는 걸 부러워했는데. 왜 그런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런 곳엘 뭐 하러 왔느냐며 내가 떠나 온 그런 회사를 아쉬워하는 걸까. 이렇고 그렇다는 말들 속에서 혼란스럽긴 했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뭐든지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이니까. 그래, 어디든 본인이 있는 곳이 제일 지옥인 거니까.
자꾸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려는 불안을 꾹꾹 눌러 가며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던 내가 마침내 흔들렸던 건, 두 번째 동기들이 하나 둘 이직을 하면서부터였다. 내가 이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 뒤로 하고 온 가치들을 향해 떠나가는 친구들과 그들을 부러워하는 또 다른 친구들을 보며, 잘 굳힌 줄로만 알았던 마음은 요동쳤다. 오래 뭉갰던 질문이 툭 비져나왔다. 그러게, 나는 왜 그런 회사에서 이런 회사로 왔지?
/
그런 회사
첫 회사는 좋은 회사였다. 사실 지금 와서 좋았다고 느끼는 것들의 대부분이 이직을 하고 나서 부딪힌 '좋지 않은' 것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깨달은 것들이긴 하지만, 어쨌든 다니고 있는 동안에도 그 회사가 '객관적으로' 좋은 회사의 조건이라 불리는 여러 가지를 갖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체계적인 의사 결정 시스템, 서로 간에 분명한 역할과 책임, 능력과 성과에 따른 확실한 보상, 단 하나의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칼 같은 원칙, 1일 차 인턴도 할 말을 하는 수평적 문화. 긴 역사를 가진 글로벌 회사답게, 많은 것들이 명확했고, 그 안의 사람들은 우리의 회사가 좋은 회사의 축에 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참으로 모든 것이 분명하기만 한 곳에서, 더더욱 해야 할 일이 분명한 영업사원을 하기에 나는 너무 생각이 많은 인간이었다. 모두가 경전처럼 달달 외웠던 각종 영업 매뉴얼, 회사가 하라는 대로만 했더니 일찍이 성공했다는 누군가의 이야기, 오늘 내 바이어가 잔뜩 화난 이유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름다운 교육 내용들. 회사는 회사가 잘 세팅해 둔 것을 그저 최선을 다해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는 친절한 비전을 제시했지만, 나는 내가 깊이 생각하고 고민한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일을 하고 싶었고, 나만의 생각이 의미를 갖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대로만 하면 된다는 확신에 찬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이따금 숨이 차 쿵쿵 가슴을 쳤다.
무엇보다도, 그래도 이만한 회사가 없다며 하루하루 내 마음을 억누르고 버티는 스스로가 너무 싫었다. 마치 직업이 '좋은 회사 다니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좋은 회사에 다닌다고 해서, 내가 그냥 대단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 빳빳한 명함을 내밀 수는 있겠지만. '나만 잘 하면 될 것 같은' 참 좋은 회사에서, 나는 내가 잘 하는 걸 잘 할 수 없어 허부적거렸다.
/
이런 회사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단벌 정장을 다시 꺼내 입고 간 면접장에서, 한 임원이 물었다. [왜 3년이나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굳이 다시 신입으로 오려고 해요? 어쩐지 웃고 들어온다 했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구만. 아니 꼭 다 포기하고 이 회사에 올 이유가 있나?] 나는 떨리는 목구멍 근육을 최대한 잡아당기며 말했다. "저는, 저는.. 생각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아직도 화장실 세 번째 칸에 숨어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이 회사의 신입 공채 결과를 확인하던 순간이 또렷이 기억난다. '합격' 두 글자를 확인하고 어찌나 머리가 댕댕 울리게 심장이 뛰었던지, 잡고 있던 변기에다 그대로 심장을 토할 뻔했다. 됐다. 이제 드디어 카피라이터가 된다. 이제 드디어, 마음껏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돈 벌 수 있다.
하지만 직업만 바꾸면 당연히 모든 것이 더 좋아질 줄 알았던 내 순진한 기대는, 굳이 긴 말 덧붙일 것도 없이, 곧 산산조각이 났다. 어쩌니, 여긴 니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닌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날 저녁 일정이 그날 오후에 바뀌고 하루에도 수십 번 '일단 다른' 생각을 짜내야 하는 광고 회사 생활은, 첫 회사에서 내가 빡빡하다, 혹은 답답하다고 느꼈던 것들을 참 깔끔하고 합리적이었다고 고쳐 생각하게 만들었다. 저곳에서 목말랐던 것들이 이곳에 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저곳에서 내가 당연히 누렸던 것들이 다른 모든 곳에서도 당연하리라는,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 착각을 했었다. 갖고 있을 땐 쿨하게 다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모든 것들이, 막상 내 손을 떠나니 세상 중요하게 보였다. 아씨 줬다 뺏는 게 어딨어! 참, 누가 뺏어 간 게 아니지.
/
더 좋은 회사
한참 자아 고민에 휘적이던 스물일곱엔, 다른 분야를 경험해 볼 수만 있다면 무급 인턴이라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아직 젊은데 연봉이 뭐가 중요하냐! 는 뜨악스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 가며. 나는 다행히 무급 인턴이 아닌 돈을 받는 신분으로 실컷 다른 분야를 경험할 수 있었고, 5년 후,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다 됐고, 돈이나 많이 줘!!"
결국 모든 이직의 끝은 '회사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로 수렴하는 건가.
나의 두 번째 회사는 첫 번째 회사보다 '객관적으로' 더 좋은 회사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아직도 5년 전 첫 직장에서의 내 연봉을 따라잡지 못했다. 현재 진행형인 예전 동기들의 연봉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이젠 비교 가능한 범주를 한참 벗어나 있다. 하지만, 매일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이 회사가 '주관적으로' 지금 내게 더 좋은 회사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니?'라는 말을 듣다가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자'는 말을 듣는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수많은 판단을 해야만 했던 스트레스가 생각을 하고 또 하느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판단을 미뤄야 하는 스트레스로 바뀌었는데, 지금까지는 후자가 더 견딜만하다. '마음껏 생각하는 일 하면서 돈 벌 수 있다'던 그 미련한 한 줄의 동기가 생각보다 힘이 셌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까진 회사를 옮기기로 한 내 선택을 '선택 중'인 상태다.
모두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언제라도 줄 수 있는 슈퍼 카멜레온 같은 회사가 나타나지 않는 한, '더 좋은 회사'라는 건 필히 주관적이고, 현재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 내가, 무엇을 더 가치 있게 볼 것인가에 따라 더 좋은 회사란 그런 회사도, 이런 회사도 될 수 있다.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일단, 내 시점을 따라 계속 움직여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내게 무엇이 맞고, 무엇은 견디기 힘든지에 대한 판단 기준은 그냥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경험이 이리저리 부딪히는 과정을 통해 다듬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을에 유학을 떠난다. 지금껏 고생하며 모은 돈의 대부분과 얼마가 될지 모를 시간을 써야 한다. 갔다 와서 뭐 할지, 정하지 못했다. 두고 가는 금덩이도 오매불망 기다릴 약혼자도 없다. 무슨 막무가내 강심장이라서가 아니다. 철저히 '주관적 현재 시점'에서 본, 더 가치 있는 다음에 대한 지금의 선택이다.
누구나에게 똑같이 더 좋은 회사는 없다. 또한 더 좋은 어딘가가, 반드시 회사여야 할 필요도 없다.
| 신입 영업사원, 신입 카피라이터로 두 번 입사한 8년 차 직장인. 여전히 변비 같은 진로 고민 진행 중.
두 번째 초년생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