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바이킹 Apr 30. 2017

그래서, 뭐 할 건데?

15/  우려보다는 격려를



2000년대 예능 프로그램에서 ‘당연하지’ 게임과 쌍벽을 이루던 것으로 ‘문장 말하게 하기’ 게임이 있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말해야 하는 것이 ‘짜증 나!’ 일 경우, 답은 가르쳐 주지 않은 채 상대방을 최선을 다해 짜증 나게 해서 그 말을 결국 하도록 만드는 식이다. 보통 원하는 답을 정확히 듣기란 쉽지 않기에 벌어지는 별의별 희한한 상황들이 이 게임의 재미 포인트. 그런데 만일, 그 게임판이 우리의 직장이고 들어야 하는 말이 '그래서, 뭐 할 건데?'라면 99%의 확률로 이 문장을 말하게 하는 찰떡같은 공격이 있다. 바로 이 한마디면 된다.


"저, 퇴사하려구요."




/

엇다 쓰게


저, 퇴사합니다. 퇴사하고 뭐 할 건데?

저, 유학 가려구요. 갔다 와서 뭐 할 건데?

저, 휴직하게 되었어요. 휴직하고 뭐 할 건데?

저, 쉬면서 생각 좀 해보려고요. 쉬고 나서 뭐 할 건데? (아니 그걸 생각해 보려고 쉰다니까요..!)


이직, 유학, 일단 멈춤 등등 모두가 하지는 않는 선택들에 반드시 따라오는 이 질문을 직장인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그 결정, 어디다 쓸 건데?’ 정도가 된다. 이제부터는 좀 본격적으로 달릴 태세를 갖춰야 ‘마땅할’ 서른 전후의 직장인이 무려 퇴사를 해버린다는 결정은 이후의 삶에서 반드시 ‘쓸 데 있는’ 것이어야만 하고, 그간 모아 둔 몇 천 만원을 들여 결혼을 한다면 모를까 유학을 간다고 하면 그 유학, 다녀온 후에 기필코 써먹을 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저 취직하려고요"라는 말에 취직해서 뭐 하려고 그러냐 묻지는 않는다. "저 결혼합니다"는 말할 것도 없다. 입시, 취업, 결혼, 출산으로 이어지는 ‘모두의 궤도’를 이탈하려는 발걸음에 대해서만 유독 그 효용을 따지고 ‘다음’을 묻는다. 한 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현실'이라는 급물살에 쓸려 내려가기라도 할 것처럼니가 아직 뭘 모르나 본데–, 다음에 디딜 돌다리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퇴사를 하면 큰일이 나기라도 한다는 듯이.



/

다음 징검다리의 위치


이직을 결정하고, 천 번의 되새김질 끝에 가까스로 내뱉은 ‘저 퇴사합니다’라는 말에 대한 주위의 첫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고생스런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들은 일단 축하를, 이직 경험이 있는 선배들은 격려를, 느닷없는 날벼락을 맞은 상사는 말없는 우거지상을 보냈다. "축하해!" "대단한걸?" ‘야 인마!!!!!’ 하지만 짧은 감탄사 뒤에 모두가 묻는 것은 한가지였다. 그래서 뭐를 하려고 그러느냐고.


아직 명함도 안 나온 새 직장에 가서 내가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가서 일해 보기 전에 미리 알 수 있는 걸까? 앞으로에 대한 물음을 품고 떠나는 유학길에서 내가 어떤 나름의 답을 찾아올 수 있을지, 짐도 싸기 전에 알 수 있다면 굳이 왜 떠나는 걸까?

아무리 계획한 대로 안 되는 게 원래 인생이라지만, 지금의 세상에선 계획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인 것만 같다. 워낙에 하루는 바쁘고 매일이 다르다. ‘나의 계획된 다음’에 대한 모범 답변을 갖고 있지 않았던 나는, 그저 "해 봐야 알 것 같아요"라는 멋대가리 없는 대답으로 질문자를 실망시켰다. 대화는 종종 그것이 얼마나 충동적이며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인가에 대한 대 토론과 나의 ‘플랜 없음’에 대한 깊은 우려로 이어졌다. 만일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됐어?'라든가 ‘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를 물었더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할 말이 참 많았는데.


나는 그때 내가 하려는 선택으로 인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얼마나 많은 밤을 후회로 땅을 칠 것인지, 내 10년 후 20년 후 커리어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수없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을 통해 그것이 그 순간 최선이라는 것만큼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

우려보다는 격려를


사실 이건 정말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라기보단 남의 인생살이에 대해 딱히 할 말이 없거나 어색해서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말하자면 ‘하우 아 유?’ 같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더욱 굳이 멋들어진 답안지를 내놓을 필요도, 없는 계획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뺄 필요도 없지 않을까. ‘아임 파인 땡큐’ 하면 그뿐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상황에서 그 답이 제일 궁금해 미치겠는 건 그 길을 가려는 본인이다. 아마 결정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걸음을 탭댄스 추듯 왓다리 갓다리 했을 것이다. 그러니 논리 정연한 우려보다는 따뜻한 격려가 필요하다. 그 선택을 하기 위해 ‘천 번을 흔들렸다면’, 완벽한 선택은 아닐지라도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짊어질 마음의 준비는 된 것이니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무릉도원을 발견한 어부도, 하쿠나마타타의 심바도, 모두 가던 길을 잃고 ‘우연히’ 접어든 길에서 인생의 역대급 장면을 만났다. 이삼십 대의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지금 선택한 길이 정확히 어디로 향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가 보지 않고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기회를 믿고 어쨌든 오늘의 한 발을 내딛는 것. 가던 길이 갑자기 땅으로 쑥 꺼지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솟아나도 ‘아임 파인’ 하며 다시 새로운 길을 덤덤히 선택하는 것. 그러니 우리, 힘내서 길을 잃어 보자. 대체 뭐를 하려고 그러냐! 는 질문엔 정답이 없다.





| 신입 영업사원, 신입 카피라이터로 두 번 입사한 8년 차 직장인. 여전히 변비 같은 진로 고민 진행 중.


* 이 글은 4월 26일 자 동아일보 '2030 세상'에 기고한 내용을 수정 및 보완하여 작성했습니다.

* 커버 사진 출처: 네이버 웹툰 '이말년씨리즈'






두 번째 초년생 다른 글 보기


매거진의 이전글 내일 아침, 제일 먼저 해야 할 바로 그 일이 싫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