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다닐 수도 없고, 그만 다닐 수도 없고
첫 직장에서는 출근 시간이 길었다. 인천에서 강남까지 영업용 아반떼를 운전해서 다니던 시절, 오로지 출근하는 데에만 딱 3시간을 찍었던 어느 월요일 아침을 기억한다. 아파트 입구부터 회사 주차장까지 약 백 킬로미터. 제2경인고속도로와 외곽순환도로와 과천-의왕 도시고속화도로와 양재대로와 남부순환로와 논현로를 타고 최선을 다해 달렸건만, 결국 회의에 15분이 늦어 된통 쿠사리를 먹었던 또 다른 아침을 기억한다. 고3도 아니면서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엄마가 쥐여 주는 고구마, 주먹밥 따위를 입에 물고 초보 운전 딱지를 붙인 아반떼를 끌고서 '밀리기 전에 고속도로를 타기 위한 일념'으로 액셀을 밟던, 많은 어둑한 아침들을 기억한다.
그렇게 서둘러 나왔는데도 주차할 자리가 없어 지하 7층까지 꼬불꼬불 내려가 겨우 차를 세우고, 그제야 로션 하나 바른 푸석한 얼굴에 사람의 꼴을 얹으러 주섬주섬 챙겨 온 파우치를 들고 주차장 화장실로 향했다. 표정 없는 낯에 웃는 얼굴을 그려 넣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또각또각 화사한 모습의 신입사원이 타고, 10분 전에 일어난 모습의 상사가 머리를 부비며 탄다. 비록 짝짝이일지언정 최선을 다해 아이라인을 그리고 볼터치를 한 내게, 그는 지나치게 솔직한 아침 인사를 던진다. "어유, 오늘 완~전 피곤해 보이네^^"
아, 퇴근하고 싶다. 아직 출근하지도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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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임파서블
신입 사원 시절, 나는 아침마다 슬펐다. 빵빵거리며 끼어드는 차들과 왠지 자꾸만 출근 시간에 공사를 하는 고속도로와 출근하지도 않았는데 울려대는 전화기 때문에 슬퍼할 겨를이 없어 더 슬펐다.
그런데 진짜 진짜 슬펐던 건, 이 꽉 막힌 도로 위에 앉아 슬퍼하는 자동차가 나 말고도 미친 듯이 많다는 거였다. 아무리 꼭두새벽에 차를 몰아 나와도, 아직 짙은 어둠이 치워지지 않은 도로 위에는 이미 수많은 차들이 제각기의 헤드라이트를 어디론가 비추며 달리고 있었다. 이 어둠 속에 있는 것이, 아직 부기도 가시지 않은 눈으로 백미러를 흘긋거리는 것이, 끝없는 긴장과 경쟁과 알 수 없는 막막함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이 괴상한 상황은 대체 무어란 말이냐. 이렇게 서로의 서글픔에 위로받으며 사는 게 인생인 걸까? 진짜 완전 더 슬프게 진짜!
믿기지 않지만 이보다 좀 더 슬픈 건, 7년이 지난 오늘 아침에도 나는 슬펐다는 것이다. 원하는 일을 찾아 회사를 옮겼고, 신입 사원 딱지를 두 번이나 뗐고, 더 이상 자동차로 출퇴근할 일이 없어졌고, 대학을 두 번이나 졸업할 만큼의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내게 출근길은 꽉 막힌 퇴근길 같다. 취업과 이직을 할 때 꿈꾸었던 '와,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근거려 미치겠어!' 따위의 즐거운 출근이란, 현실의 내겐 영영 불가능한 미션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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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태산 같았던 취업의 문턱을 넘은 후엔, 정말이지 무엇보다도 '출근'이 제일 힘들었다. 12년 동안 무언갈 받기 위해서 '등교'했던 곳과는 달리 매일 무언갈 해내야 하는 빡빡한 곳으로, 매일 같은 시각에 반드시 가야만 한다는 새로운 행동 양식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적응하기 참 어려운 것이었다. 거기에 하루 최소 8시간을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니!
그렇게 힘들게 온 회사에서는, 게다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를테면 자리에 앉자마자 선배가 묻는다. 커피 마셨어? 나는 숨 좀 돌리고 조금 이따가 마시고 싶은데, 혹은 오늘부터 커피를 줄이기로 했지만, 마치 출근길 내내 커피가 고파서 죽을 뻔했다는 얼굴로 함께 커피를 사러 간다. 돌아오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불러 무언갈 물어보거나 지시하는 상사, 실시간 주식 현황판을 보듯 촤르륵 들어오는 이메일과 착실히 울려 주는 전화기. 그렇게 '내 의지'가 아닌 것들로부터 시작된 일들을 쳐내다 보면 오전 시간은 참 쉽게도 지나간다. 매일 내 맘 같지 않은 점심 메뉴(순댓국이나 먹으러 가지!)를 피하러 어쩌다 동기와 약속을 잡아도, 돌아서고 나면 점심시간 내내 회사 욕만 했다는 걸 깨닫는다. 속이 시원하긴 한데, 시원하지 않은 것도 같다. 딱히 오늘 오후의 일과도 별 기억나는 것이 없다. 분명 무언갈 굉장히 열심히 한 것 같은데.
그렇게 '사회생활'이라는 곳으로 영혼을 출장 보낸 채 정신없이 살다 보니, 아침마다 나는 머리를 감다 말고 묻는 거다. '가만있어봐라.. 내가 샴푸를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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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사.. 사...!
"나는 회사와 결혼한 것 같애."
라고 말하던 동기가 있었다. 당연히 나는 벙쪘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아니고, 우리 회사 사장님도 아니고, 겨우 2년 차 사원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진심이야? 그녀는 설명했다. 취업 전이 밀당도 하고 간도 보는 연애 시기라면 취업 후는 마치 결혼 생활과 같다. 연애를 할 때는 심각하게 서로 맞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지만(이론상으로는) 결혼 후엔 이혼을 하지 않는 이상 헤어짐이 쉽지 않은 것처럼, 회사라는 게 마치 그렇더라는 것이다. "일단 입사한 이상, 퇴사하지 않을 거면 그냥 참고 살아야지 뭐." 그녀는 담담하게 웃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사X를 품고 산다. 사, 사.. 사장님! 사.. 사... 사랑합니다♡ 젠장, 이러다간 사, 사, 사리가 나올 판이다. 차마 꺼내놓지도 못할 그것을 가슴에 품고 오늘도 우린 일단 꾸역꾸역 출근을 했다. 서류상 완전히 갈라서기 전까지는, 묵묵히 서로의 단점을 껴안고 인내하며 살기로 한다. 심지어 팀장쯤 되면, '애는 착해' 하며 회사를 감싸기 시작하는 경우도 많이 본다. 사실, 그 팀장의 가슴속에도 아직 사표(!)는 있을 것이다. 가끔씩 내일 당장 때려칠 것 마냥 주먹을, 그것을 그러쥐게 하는.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을 때 한번씩 가만히 만져 보는.
가끔 바깥에서 점심을 먹고 들어갈 때, 마침 회사 앞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어도 나는 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다시 신호등이 바뀔 때까지 느릿느릿 걷는다. 사.. 사... 사랑해 마지않는 회사에 전력을 다해 뛰어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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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러나, 그래도
'돈 진짜 짱인 것 같다. 얼마나 짱이냐면 사람들이 회사를 감.'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 '짤방'을 보고 빵 터진 적이 있다. 너무 웃겼다. 너무 슬퍼서.
사실 출근이란 건 진심 대단하다. 매일 아침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엄청나게 일찍 일어나 엄청난 출근길을 뚫고 엄청나지 않은 일들을 하러 간다. 아침 7시 16분 1호선 용산행 급행열차를 타보지 않은 사람은, 비 오는 날 신도림 환승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혹은 9호선 지옥철 문 앞에 서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대단한 출근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인생을 위로하기엔, 출근이라는 문 뒤에 이어지는 진짜 오늘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다.
그래도! 무작정 콱 그만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때로 돈은 진짜 짱이니까. 아무리 퇴근길 같은 출근길이어도, 커피를 내 맘대로 못 마셔도, 나는 누군가에겐 미치도록 간절한, 그 자리를 꿰차고 앉은 이 시대의 멋진 젊은이니까. 그리고 불과 얼마 전까지, 그 누군가는 나였으니까. 그래서 다닌다. 그러나 때려치고 싶다. 그래도 아직은..!
위로하지 않아도, 끙끙대며 참지 않아도, '웃퍼' 하지 않아도, 오늘 이 출근길에 조금이라도 행복을 느끼기란 정말 불가능한 미션인 걸까? 오늘도 나는 그래서, 그러나, 그래도를 수만 번씩 반복하며 또다시 일단 출근을 했다. 이게 참 미칠 노릇이다. 다닐 수도 없고, 그만 다닐 수도 없으니.
| 신입 영업사원, 신입 카피라이터로 두 번 입사한 8년 차 직장인. 여전히 변비 같은 진로 고민 진행 중.
*미생 OST 중,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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