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바이킹 Apr 08. 2017

내일 아침, 제일 먼저 해야 할 바로 그 일이 싫어서

14/  아침은 밤보다 캄캄했다



벌써 6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내 기억에 어제인 듯 선명한 장면이 있다.

여느 때처럼 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던 밤, 퇴근길 BGM처럼 늘 틀어놓던 라디오의 '꿈과 음악사이에'도 이젠 끝나버린 깊은 밤, 그날은 어쩐지 아파트 입구에서 우회전을 해 집으로 가는 대신 정문 앞 길가에 차를 세웠다. 왜 그랬는가는 모르겠다. 아무런 계획 없이 시동을 끄고, 가만히 차 앞 유리 너머 어둠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밤공기는 새카맣다 못해 검푸른 남색이었다. 캄캄- 했다. 지나가는 별빛 하나 없이 캄캄하기만 한 이 밤이, 마치 내 미래처럼 느껴졌다. 주먹을 쥐고 핸들을 때렸다. 팡팡. 팡팡. 팡. 팡팡. "... 앞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나 스스로도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악에 받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여기서 그만두면, 나는 정말 패배자가 되어 버릴 것 같단 말이야. 이렇게 나이가 많은데(그땐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이제 와서 뭘 다시 해볼 수 있겠냔 말이야. 이 핸들을 돌려서 갈 수 있는 곳은 이제 세상에 없을 것 같단 말이야. 이미 내릴 수 없는, 잘못된 궤도 열차에 올라 버린 것 같단 말이야. 나는, 나는, 정말 아무것도 어쩌지 못할 것 같단 말이야! 순정만화 속 주인공처럼, 오글거리는 학원물의 반항아처럼, 듣지 못하는 밤하늘을 향해 나는 뱃속 깊은 곳부터 끌어올린 쇳소리를 내질렀다. "내일, 당장, 제일 먼저, 해야 할, 바로, 그 일이, 너무너무- 싫어어어어어-----!!!!!"


어느새 뿌얘진 유리창에, 제일 힘없는 벚꽃잎 하나가 팔랑팔랑 내려앉았다.




/

차라리 눈을 감고 싶다


대학 5학년, 학교 컴퓨터실에 앉아 바나나 한 개로 점심을 때우며 선배들의 취업 후기를 읽고 또 읽던 때, 나의 첫 직장에 먼저 입사한 선배가 학교 홈페이지에 써 놓은 글 중 이런 대목이 있었다. '우리 회사가 최고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나 두근거린다'는. 회사라는 곳에 들어가기 위해 죽을 똥을 싸고 있으면서도 여기저기서 들리는 지옥 같기만 한 '회사 생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던 나는, 모니터 너머의 그 초현실적 아침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나도 저런 아침을 갖고 싶다. 나도 저렇게 막 가슴이 두근거리고 싶다. 저 회사에 들어가면, 나도 이런 '매우 만족' 후기를 남길 수 있을까? 당시의 내겐 '뻥치시네!' 하며 저것이 멋진 취업 후기를 쓰기 위한 과장일까, 나 이런 곳에 취업했다는 졸업생의 자부심일까 생각해 볼 여유 한 줌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그저 더 많은 바나나를 삼켜 가며, 지쳐가는 나 자신을 붙들어가며, 매일매일 가슴 뛰는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한 '저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야흐로 그곳에서 맞이한 칠백 이십오 번째 아침, 나는 그때의 그 선배와 똑같은 이유로 퇴사를 결심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진짜 저리도록 두근거려서. 오늘 해야 할 일들이,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만큼 나를 힘들게 했던 바로 그 일들이 너무나도 생생히 그려졌기 때문에.



/

굿모닝, 똑같은 아침입니다


3년 차 소비재 영업사원의 아침 루틴은 이랬다.

 

어제 일자 출고 실적을 보고 - 이번 달도 실적 맞추긴 글렀구나

오늘 자 재고표를 열어 재고를 보고 - 헉, 이 제품 또 빵꾸났네!

매장 여사님들께 문자 공지를 돌리고 - 'XX 샴푸 550ml 품절입니다. 죄송해요!ㅠㅠ'

분명 어젯밤 열한 시까지 읽다 퇴근했는데 마치 그런 적 없다는 듯 켜켜이 쌓인 이메일들을 쳐내고 - '경쟁사 현황 보고 안합니까? -바이어' / 'OO거래처 실적이 미진합니다. 행사 플랜 짜오세요 -부장' / '이번 달 정산이 안 맞아요. 이따 세 시쯤 미팅하시죠 -경리부' / '대리님! 이거 경쟁사 매대 사진이에요! 우리도 샘플 좀 많이 보내달라니까요 쫌! -협력사 팀장' / '차주 필수 교육 참석 여부 회신 바라며... -인사팀'


... 나면 배가 고팠다. 어김없이 점심시간. 오늘은 차돌 된장을 먹을까, 쥐눈이콩 비지를 먹을까. 에이, 다 귀찮으니 그냥 김밥이나 사다 먹어야겠다. 어차피 오후 미팅 자료도 아직 못 만들었는데. 점심시간이면 불이 꺼지는 사무실 칸막이 안에서, 내비게이션이 졸음운전 유의하라고 말해 주는 차 안에서, 나는 많은 날들의 낮 열두 시에 맛살과 오이와 단무지를 씹었다. 아무렇지 않은 날들이었다. 어제와 오늘과 다음 주 월요일이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스물다섯에서 일곱 사이, 가슴 뛰는 아침에 대한 나의 꿈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한 입씩 씹혀갔다.



/

어느 날 갑자기


그날 아침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속도로는 평소처럼 밀렸고, 커피도 평소처럼 마셨고, 늘 앉던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폈고, 평소처럼 달칵달칵 재고표를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뚝, 눈물이 나왔다. 오늘 나가야 할 면도기의 행사 물량과 매장에서 애타게 기다릴 생리대 샘플 재고가 잘 있는지 얼른 확인해야 하는데, 이건 도무지 눈물이 좍좍 흘러서 엑셀을 볼 수가 없었다. 꾹 다문 입 안으로 울음과 함께 참았던 물음 하나가 꾸역꾸역 올라왔다.  '왜?'  나 왜 매일 아침 숫자를 세고 있는 거야?


'매일 아침 재고표 열기'라는 행위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었다. 이런 반복되는 일 따위 말고 내게 더 멋지고 화려한 일을 달란 말이야! 하는 생떼도 아니었다. 내가 책상에 편히 앉아 있는 지금도 매장에서, 창고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매장 여사님들과 대리점 사장님들에게 이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매일 아침 숫자를 세고 있는 내가, 하루 종일 이어지는 미팅에서 '-은,-는,-이,-가'를 빼면 줄줄이 숫자로만 이루어진 대화를 하는 내가, 늦은 밤 사무실 책상에 잔뜩 몸을 기울이고 앉아 엑셀 파일에 빼곡한 숫자를 채워 넣는 내가, 갑자기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꼭, 여우네 집에 놀러 온 두루미 같았다. 서울쥐 집에 놀러 온 시골쥐 같았다.

'취직 성공'이라는 콩깍지가 벗겨진 시골쥐는 놀라서 여우에게 물었다. "근데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야?"



/

직장에선 자아실현하는 거 아니야


나는 애초에 숫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대학 입시 때는 수시를 붙어놓고도 그놈의 수리영역이 나를 재수시킬 뻔했다. 맞추라고 주는 문제라는 1번 문제도 틀렸다. 그런 내가 어느새 매일 아침 숫자 하나에 가슴 졸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2-3년 차의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오만 것이 다 궁금했던 2-3살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인생 최대의 질문, '왜?'. 그 질문이 고개를 드는 순간, 바로 그때부터가 직장인 고난의 시작이다. 히어로 무비의 평범한 주인공이 어느 날 자신의 능력을 각성하듯, 그 때문에 온갖 고뇌와 영웅담이 동시에 시작되듯.


다른 동기들이 '어떻게'에 집중하며 열심히 경험의 근육을 불려 나가는 동안, 나는 홀로 멍청히 서서 '왜?'의 늪에 점점 더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다. 내가 매일 아침 일어나서 하는 이 일들이 내 인생에 왜 필요한지. 나는 이런 일들을 통해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건지. 지금 찍고 있는 이 점들이 내 인생을 어디로 연결시켜 줄 수 있을지. 이것이 정말 내가 생겨먹은 대로 살 수 있는 길이 맞는지. 한 글자로 시작된 질문은 점점 인생 전체에 대한 백 가지 질문으로 세포 분열을 했다. 갑자기 미치도록 풀고 싶은 문제가 생겼는데,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낼 수 있는 사람은 하필 수리영역 1번도 틀리는 나 말고는 없었다. 이 문제가 오십만 배쯤은 어려운 거였는데.


어느 날 아침, 모닝커피를 마시며 나는 동료 하나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는 말했다.

"야, 직장에서는 자아실현하는 거 아니야."



/

벚꽃 엔딩


취직 2년 만에 또다시 바나나를 씹으며 '직장에서도 실현할 수 있는 자아'를 찾아 헤매던 중, 어느 신문기자의 인터뷰가 눈길을 붙잡았다. 기자라는 직업의 높지 않은 월급, 잦은 야근 등 소위 '짜침'에 대한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직장인들은 보통 한 달에 한 번(월급날) 행복하다고 하죠? 전 딱 한 달에 한 번만 불행해요."


사람마다 일의 가치를 두는 곳은 다르다. 누군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저 아래 순위의 것일 수 있다. 누군가에겐 연봉이, 누군가에겐 승진이, 자기 계발이, 회사 분위기가, 오늘 밤 길가에 차를 세우고 핸들을 때리게 하는 고민거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유야 저마다 다를지언정 취직, 그 이후의 삶이 상상 이상으로 고단한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거다. 그것을 입사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을 거라는 것도.


내겐 매일 아침 내가 하는 일들이 내 인생에서 갖는 의미가, 그리고 그것을 '내가 알고서 일을 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직을 하고 나서의 삶은 어쩌면 이전보다 훨씬 더 고되다. 끼니보다 잠을 더 자주 거르고, 종종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한 입 크게 담는다. 여전히, 어느 날 갑자기 운다. 다만 전과는 다른 이유로. 내일 아침에 해야 할 일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맘처럼 잘 되지 않아서, 잘 해낼 자신이 없어서, 너무 빡쳐서, 혹은 오늘 하루 만에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생각해보니 여전히 불행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가끔, 좀 괜찮은 순간들이 생겼다. '나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지.', '내가 오늘 야근을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지.' 하고 문득 알아차릴 때. 이를테면 벚꽃이 예쁘게 흩날리던 오늘 밤 퇴근길 같은.





| 신입 영업사원, 신입 카피라이터로 두 번 입사한 8년 차 직장인. 여전히 변비 같은 진로 고민 진행 중.



*에피톤 프로젝트, '봄날, 벚꽃, 그리고 너'






두 번째 초년생 다른 글 보기


*커버 사진 출처

http://www.oeker.net/bbs/board.php?bo_table=gallery&wr_id=313654



매거진의 이전글 출근했는데 퇴근하고 싶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