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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바이킹 Feb 28. 2017

그런다고 누가 알아줘?

12/  내가 알아주는 일



“어, 너 왜 집에 안갔...?!”

밤 11시를 조금 넘긴 시각, 꼭 닫힌 한 평 짜리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사수는 새까만 글씨들로 가득 찬 내 노트북 모니터를 보며 그대로 멈춰 섰다. 그리곤 내뱉은 세 마디. 오. 마이. 갓.

열이 올라 벌게진 얼굴을 모니터에 들어갈 기세로 갖다 붙이고 몇 시간째 굳은 어깨로 키보드 깜지를 쓰던 나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왜..왜..왜요..? 무.. 뭐가 잘못됐어요…?!!?



‘금번 교육에서 느낀 점은 무엇입니까?’

~류의 질문 서너 개에 간단히 답을 하면 되는 일이었다. 업무와 관련된 보고서도 아니었고, 그저 신입 사원 교육에 대한 형식적인 피드백을 요구하는 5분짜리 설문에 나는 무려 다섯 시간이 넘도록 코를 박고 ‘역사에 남을 답변’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갓 3년 차가 된 사수는 기함했다.


“너, 감기 걸렸다며. 지금 뭐 하는 거야. 얼른 들어가”

“저, 이거 내일까지 내야 하는데요ㅠㅠ”

“아니 이게 뭐라고 아픈데 야근까지 해. 회사는 너 아픈 거 안 알아줘.


입사한 지 한 달이 채 안 되었던 때, 난생처음으로 귀에 들린 그 말은 참으로 생경했다. ‘회사는 안 알아줘.’

모범생 콤플렉스를 꽉 틀어안고 살아온 지 25년, 항상 ‘누구보다 열심히 하기’는 내가 가진 원 앤 온리 무기였다. 약간의 베리에이션이 있긴 했다. 엄청 열심히 하기, 대단히 열심히 하기, 미친 듯이 열심히 하기. 후에는 늘 보상이 따랐다. “잘했다!”라는 칭찬, 혹은 “해냈어!”라는 성취감. 아무도 무언가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 자체를 쓸모없다 말한 적은 없었다. 잠시 뭉게뭉게 할 말을 찾고 있는 내게, 다시 한번 듬직한 3년 차 직장인은 힘주어 말했다.


“너, 그렇게 쓸데없는 거 열심히 하지 마. 그런다고 아무도 안 알아줘.



결국 뭔가 덜 닦은 기분으로 대충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그날, 신입사원은 일기에 썼다.

아, 회사에서는 ‘누가 알아주는 일’을 해야 하는 거구나.






/

오늘의 나는 얼마입니까


학생에서 직장인이 된다는 것은, 여태껏 ‘(내)돈 내고’ 살던 삶에서 ‘(남의)돈 받으며’ 사는 삶으로의 변화다. 자연스럽게, 돈 받으며 사는 세상에서 직장인의 가치는 소위 그 ‘돈값’을 하느냐 못 하느냐로 판단된다.

사실 회사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효율’ 임을 생각하면 맞는 말이다. 회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직원이 쓸데없는 일에 힘 빼지 않고 효율이 나는 쪽으로 열일하는 것이 좋다. 직원의 입장에서도 회사가 자신의 능력과 노고를 알아주어야 월급도 오르고, 승진도 한다. 따라서 한정된 시간 안에서 모든 잘잘한 일에 영혼을 바치기보다, 누구라도 알아주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이익인 듯싶다. 회사라는 곳에선 그래야 ‘잘 하는 것’이고, 노동의 대가로 남의 돈을 가져오는 구조에서 남들이 나의 ‘돈값’ 여부를 따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니까.


문제는, 내 스스로도 타인에게 나의 돈값을 묻고 있다는 데 있다. 내게 주어진 일,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끊임없이 타인의 인정을 갈구한다. 내가 이만큼 고생했으니 요만큼은 인정해주겠지? 이 프로젝트에서 내가 제일 많이 밤샌 거 팀장이 알고 있을까?  저기요, 오늘 나는, 돈값하고 있나요?



/

누가 나 좀 알아주세요


회사라는 생태계에 적응하면서, 직장인은 살아남기 위해 이런저런 요령들을 탑재한다. 3년쯤 지나면, 이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레 자타공인 ‘자기 몫(이라 쓰고 돈값이라 읽는다) 하나는 든든히 하는’ 사회인으로 진화한다. 헌데, 요령과 함께 쌓은 엉뚱한 경험치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알아주는 것’에 대한 집착이다.


때론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고, 때론 스스로의 적응력에 감탄도 하면서 열심히 인정받기 위해 일을 했더니, 이젠 ‘누가 알아주어야만’ 비로소 잘했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충분히 괜찮게 일을 해 놓고도, 다른 이의 평가 혹은 잠재적 평가에 오늘도 마음은 한없이 약해진다. 처음에는 ‘내 꿈을 펼치리’ 하며 입사했던 신입사원은, 어느새 ‘어떻게 하면 부러움의 대상이 될까’에 골몰하고 있는 대리, 과장, 차장이 된다. 남들과 비교해 전혀 특별하지 않아 보이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왜 나는 쟤처럼 인정받지 못할까 싶은 불안감을 안고 오늘도 타인에게 최선의 선택지로 뽑히기 위해 발가락에 바짝 힘을 준다. 너무나도 타인의 인정과 칭찬에 목이 마른 나머지, 저만치에서 나의 인정을 기다리고 있는 나 자신에게는 수고했어, 한번 말해 줄 새가 없다.



/

만족할 것인가, 만족 당할 것인가


몇 달을 밤을 새우며 성사시키려 노력했던 프로젝트가 어그러졌다고 하자. 회사는 투자한 만큼의 금전적 손해를 볼 것이고, 곧 그를 대체할 만한 다른 프로젝트를 찾을 것이다. 그럼, 나는?

그간 이 프로젝트에 갖다 바친 내 시간은? 칙칙해진 내 피부는?(이건 정말 중요하다!) 불어난 내 옆구리살은? 망가진 내 인간관계는? 그 시간에 할 수 있었던 수많은 다른 일들은? 그 모든 것들은, 그럼 누가 알아주는데? 프로젝트가 망가졌으니 남들은 전-혀 알아주지 않을 텐데! 회사의 회계장부에 그려진 마이너스처럼, 나도 ‘음. 인생을 요만큼 손해 보았군.’ 하면 되는 건가?


내 시간과 노력에 대한 가치는, 대차대조표를 읽듯 한눈에 플러스 마이너스로 계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의 성패 여부나 타인의 인정 여부와는 관계없이,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그 시간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을 나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만큼의 나의 인생은 조용히 사라지고 만다.


중요한 일, 티 나는 일을 해냈을 때 회사는 ‘잘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내 자신까지 그래야만 할까? 오늘 하루 종일 선배들 심부름을 하고, 복사를 하고, 회의에 필요한 간식을 사 오고, 영수증을 이쁘게 정리하느라 고생한 신입사원은, 그럼 오늘 하루 잘한 일이 하나도 없는 건가? 회사가 나의 사용가치를 판단하는 것과, 내 스스로 나의 노동이 효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나는 일을 하며 스스로 만족할 것인가, 타인에게 만족 당할 것인가.



/

내가 알아주는 일


영업본부 인턴을 하던 시절, 나는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고 무조건 몰아붙이는 상사에게 단단히 마음이 꼬여 있었다. 어디 한번 두고 보라지. 내가 XX 꼭 합격받아서 때려칠테다(!). 나는 속으로 그르릉 거렸다.

첫 직장을 나오던 때, 모두가 아니 왜 이 좋은 회사를 때려치우고 스스로 고생길을 자초하느냐 혀를 찼다. 그르릉! 두고 봐라. 내겐 당신들이 말하는 ‘좋은 회사’와는 다른 기준이 있다는 걸, 꼭 보여 주고 말 테다.


인턴을 통과해 회사에 합격을 했고, 한참 후 이직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말로 ‘두고 보았는가?’ 아니! 사람들은 나라는 타인의 인생 곡선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두 눈 크게 뜨고 있는 힘을 다해 나의 성취를 지켜보고 있던 것은, 사실 나 자신이었다.

입사와 퇴사와 재입사를 거치며 내가 얻었던 성취감은 남들에게 비로소 무언갈 보여 주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밤을 새워 고민했던 나날들이 기특해서, 내가 최선을 다해 얻어낸 결과가 뿌듯해서, 내가 이를 악물고 버텨 온 시간들이 짠해서, ‘해냄’의 순간순간마다 나의 가슴은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직장생활 중 종종 '두고 보자!’를 되뇌었지만, 정작 무언갈 이뤄낸 뒤엔 남들의 인정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성취 이후에 따라온 또 다른 시련들은 우선 차치하고, 해냈을 때의 그 벅차오름은 그 누구 때문도 아닌 내가 해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서 보듯, 우리에겐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의 존재감을 찾는 습관이 깊이 배었다. 그런데, 연인 관계도 아닌 직장생활에서조차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줘야만 나의 노동이 의미 있는 걸까? 누군가 ‘잘했습니다!’ 하면 내가 무언갈 이룬 것이 되고, ‘못했습니다!’ 하면 그 성취는 없던 것이 되는 걸까? ‘성취감’이라는 것은, 본디 내 안에서 솟아오르는 감정이다. 내 성취감에 대한 남의 허락이 왜 필요한가? 월급과 고과는 철저하게 남이 주는 거지만, 성취감은 내 스스로가 주는 것이다.



/

작은 성공의 경험


자, 내가 나를 알아주려고 보니, 막상 어디서부터 무얼 잘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특히나 스스로에 대한 기준치가 ‘넘나’ 높은 모범생들의 경우엔 더 어렵다. 사실 스스로를 인정한다는 것은, 단단한 자존감을 바탕으로 수많은 연습을 해보아야 하는 일이다. 그럼 어디서부터 출발해보면 좋을까? 그 시작은 바로 ‘작은 성공의 경험’을 늘리는 것에 있다.


복사기가 어디에 있는 줄도 몰랐던 내가, 어느 순간 척 척 팩스를 보내고 있지 않은가? 하나의 커다란 빙고판처럼 보이던 엑셀 문서를, 어느새 피벗을 돌려 가며 촤르륵 만들어 내고 있지 않은가? 처음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거래처 사장님이, 오늘은 내게 커피를 한 잔 타 주지 않았는가? 하루 8시간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던 내가, 어느새 힘들어하는 후배를 위로해주고 있지 않은가?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겠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런 무수한 작은 성공의 순간들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내가 노력해서 나아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이다. 그런 작은 성공의 경험들을 무심히 흘려보내지 말자. 놓치지 말고, 반드시 콕 찝어내어 알아주자. 어느새 이만큼이나 나아졌구나, 잘했다. 이젠 이걸 할 수 있게 되었구나, 잘했다. 네? 고맙다구요?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구나! 수고했다. 수고했다고? 잘했다!


이것은 단지 ‘수고했어, 오늘도’ 하고 마는 셀프 쓰담쓰담이나 자조적인 위로가 아니다. 이건 진짜다. 진짜로 노력했고, 진짜로 성장하고 있고, 진짜로 잘하고 있는 나에 대한 팩트를 인정하는 거다. 이렇게 스스로를 인정해 준 경험이 쌓이면, 서서히 남들이 관심 있는 노동의 결과에만 지나치게 집중하지 않고, ‘노동의 과정’ 자체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작은 성공의 경험들이 만드는 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내가 이다음에도 성공할 수 있다는, 힘차게 뿌리내린 자존감이다.



‘그런다고 누가 알아줘?’ 상관없어. 내가 최선을 다한 거, 내가 알아.



/

나의 행복을 적에게 맡기지 마라


타인의 기준, 회사의 기준, 그리고 무엇보다 높은 스스로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나날들을 살아내며, 우린 칭찬을 잊었다.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냐며 ‘직장인답게’ 냉소하던 그 선배보다 한참은 더 선배가 된 지금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너무 잘 안다. 찬물 더운물 가릴 줄 몰랐던 신입사원의 요령 부족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에 대해 할 말이 있다. ‘인정받는 것’ 하나를 목표로 삼는 것은, 나 스스로를 ‘인정받기 위해 사는 사람’으로 묶어 두는 것과 같다. 이것은 비단 일 뿐만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안에 스스로 행복할 줄 아는 동력이 있는가의 문제다. 타인의 칭찬에 기대지 않고, 세상으로부터의 인정에 기대지 않고, 오늘의 나를 돌아보며 잘했다, 할 수 있는 힘, 자존감.

그러니 나의 죽음, 아니 나의 행복을 적에게 맡기지 말자.


퇴근 시각이 가까워온다. 오늘의 퇴근길엔 나에게 ‘그래도 수고했어’라는 아쉬운 토닥임보다, 자존감 뽝 들어간 칭찬을 한번 보내보면 어떨까?


하이고, 잘했다!





| 신입 영업사원, 신입 카피라이터로 두 번 입사한 8년 차 직장인. 여전히 변비 같은 진로 고민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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