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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바이킹 Jun 23. 2017

퇴사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18/  괜히 그만뒀나



"거긴 그래도 좋은 회사였다. 나와 보니까, 알겠더라고.”  

예상했던 대로다. 얼마 전 직장을 옮긴 그는 세상 다 초월한 얼굴로 맥주를 쭉 들이켜곤 이제는 익숙한 저 대사를 쳤다. 내 어깨를 도닥이며 '넌 꽉 붙어 있으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그의 빈 잔을 채워 주며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빵은, 갓 구운 빵. 세상에서 제일 좋은 회사는, 갓 그만둔 회사.’




/

기억의 저편


가끔 회사를 나간 선배나 동료들을 만날 때면 빠지지 않는 이야기는, ‘나와 보니 거긴 좋은 회사였다’는 것이었다. ‘그 팀장이 뭐 또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월급은 여기보다 적었지만, 거기선 그래도 일주일에 두 번은 칼퇴할 수 있었는데.’ ‘최소한 거기서 사람 스트레스는 없었단 말이지.’


뭐지, 내 기억으론 분명 ‘거기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살도 빠지고, 머리도 숭숭 빠지던 사람들인데. 이를 바드득 갈며 ‘이놈의 회사’를 저주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왜 마치 구남/여친 그리워하듯 저리도 아련한 얼굴이 되는 걸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잡아먹기 직전이었던 나쁜 회사는, 어느 순간부터 ‘그래도 그 정도면’ 좋은 회사가 되어 있었다. 눈에서 멀어졌는데, 마음에선 오히려 가까워지는 신기한 현상. 이직을 하고 적당한 시간이 흐른 뒤, 나에게도 그 현상은 일어났다. 맥주를 쭉쭉 들이켜고 말했다. "있잖아, 내가 나와 보니까..."


퇴사한 우린, 후회하고 있는 걸까? 스스로도 헷갈린다면 이렇게 질문해 보자.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갈래?"

대답은 아마 No일 것이다.



/

변화의 값


삶에서 어느 정도 익숙해진 무언가를 떠나 새로운 변화를 준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곳에서 쌓아 온 ‘경험치’를 얼마간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몇 년 간 열과 성을 다해 게임 캐릭터를 하나 키웠다고 하자. 변변한 아이템도 요령도 없이 어설프게 시작했지만, 이젠 꽤 높은 경험치에 나름 자신 있는 영역, 고락을 함께 하는 동지도 생겼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게임이 완전히 리셋되고, 훨씬 더 재미있는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된다면 어떨까? 대신, 애써 키운 캐릭터도 그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키워야 한다는 전제 하에.


새로운 도전에 끌려 업그레이드를 선택하긴 했지만, 아마도 한동안은 자꾸만 내게 더 익숙한 이전 방식과 제법 노련했던 과거의 내가 자꾸만 눈에 밟힐 것이다.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고, 아무리 맘처럼 되지 않던 일이나 숨소리마저 싫었던 사람들도, 낯선 곳에서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을 때면 다 이보다는 나았던 것 같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또 새로운 곳에 적응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더 센 전투력을 갖게 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지금 당장’은 아니기에 일단은 어색하고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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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업


“그 회산 좋은 회사였다”는 말은 후회, 또는 흔한 과거 미화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사실은 그건 그만큼 나의 ‘영역’이 넓어졌다는 의미다. 이전 회사를 다니던 중에는 그 회사에서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이 직장생활에 대한 기준이 되었다면, 퇴사 후 새로운 '비교 대상'이 생기면서 이전엔 없었던, 다양한 관점에서의 판단 기준이 생긴 것이다. 사실 여러 번의 이직을 경험한 중견 사원들은 이미 알고 있다. 회사가 다르면, 당연히 옳고 그름이나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는 기준도 다르리라는 것을. 나의 경우처럼 [첫 회사에서 겪은 것 = 회사란 이런 것]이라는 틀을 깨고 나와 처음으로 '세상의 다른 회사'를 겪게 된 저연차 직장인일수록, 새로운 곳에서 마주치는 새로운 기준과 상식은 '문화 충격' 급의 혼란으로 다가오기 쉽다.


간절히 원했던 무언가를 이룬 후엔, 그것을 ‘이루고자 했던’ 가장 큰 마음의 동력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두려움이나 불안함 같은 성질 급한 감정들이 들어앉는다. 그런데, 그 감정을 쫓아내려는 마음은 더 성질이 급한 게 문제다. 나 역시 눈 앞의 파리처럼 윙윙거리는 그 감정들을 하루빨리 떨쳐내려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차라리 짐짓 여유 있는 척, 나 스스로에게 시간을 좀 넉넉히 줄걸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모든 것이 내가 만든 변화로 인해 더 넓은 시야를 '득템'한 탓이라 생각하고 말이다. 그야말로 진정한 레벨 업의 순간이 되었을 텐데.


눈에 보이는 경험치를 잃었다 하더라도, 내가 내 안에 쌓아 둔 경험치가 어디로 가지는 않을 거다. 다만, 다시 원래의 실력을 발휘하게 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다. 그러니, 내 걸음걸음을 좀 더 믿어주기로 한다. 어려움은 지나갈 것이고, 새로움은 곧 배움으로 스며들 것이다. 우리에겐 내공이 있으니까. 퇴사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은, 이전 회사 좋았다는 작은 깨달음 하나가 아니라, 퇴사하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그 나머지의 세상이다.





| 신입 영업사원, 신입 카피라이터로 두 번 입사한 8년 차 직장인. 여전히 변비 같은 진로 고민 진행 중.


* 이 글은 6월 21일 자 동아일보 '2030 세상'에 기고한 내용을 수정 및 보완하여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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