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팝스, 36년의 세월을 품은 영어 라디오

그러나 방송보다 더 중요했던 것

by 이보라




너무 두껍지도, 너무 얇지도 않은, 책장 넘김이 편한 적당한 두께. 너무 하얗지도, 너무 누렇지도 않은, 눈이 편안한 적당한 색감.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가방에 쏙 넣기 편한 적당한 크기. 너무 거칠지도, 너무 매끄럽지도 않은, 볼펜의 밀림이 좋은 적당한 질감.


완벽한 책이었다. 영어 공부를 하고 싶게 만드는 책인지는 모르겠지만 갖고 다니고 싶게 만든 책. 가볍게 팔랑팔랑 들고 다니면서 보면 (보는 척하면) 영어 공부 좀 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마법 같은 효과가 있던 책.


영어 공부 좀 한다는 사람들이 즐겨 듣던 굿모닝 팝스 라디오가 있었다. 팝 음악도 듣고 영어 공부도 하고 좋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안타깝게도 나는 굿모닝 팝스에 영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내용 구성도 좋고 설명도 좋았던 것 같지만 흥미를 끄는 요소가 좀 약했다. 구구절절 설명해 주는 것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팝을 좋아했지만 팝 가사를 공부하는 건 글쎄 딱히?


그나마 굿모닝 팝스를 조금이나마 들었던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저 미적 감각이 뛰어난 굿모닝 팝스 교재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열심히 들은 게 아니기 때문에 영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크게 되지는 않았다. 영어 교재를 고르는 실력은 향상되었을 수도 있고, 주기적으로 책을 사들이느라 통장 잔액이 줄어드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굿모닝 팝스로 대학교 때 영어 공부를 했다는 남편이 2024년 굿모닝 팝스를 다시 들을 거라고 했을 때 뻥인 줄 알았다.


무슨 소리야? 그게 어떻게 아직도 있어?


너무나도 뻥 같았는데 뻥이 아니었다.


월간 교재도 계속 판매되고 있었고, 정기 구독도 여전히 있었다. 라디오는 전혀 듣지 않고, 팟캐스트도 거의 듣지 않는 나에게 라디오 월간 영어 프로그램이, 그리고 책 정기구독이라는 개념이 살아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문화 충격이었다. 곽영일, 오성식, 이지영, 이근철 등 많은 인기 DJ를 품으며 무려 36년간 이어져 온 방송이었다.


남편은 굿모닝 팝스로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몇 개월 후 굿모닝 팝스 프로그램은 종영을 선언했다(우연인가 악연인가).


종영으로 사라졌지만, 사실 진짜 사라진 건 아니었다.


홈페이지에서 다시 듣기로 이전 방송을 들을 수도 있고 (남편이 듣고 있다), '상쾌한 아침' 방송의 코너 프로그램으로 들을 수도 있다고 한다 (남편이 듣고 있다).


사라질 뻔했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도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부디).





[삽질 복기]

- 교재를 사면 본전을 뽑았어야 했는데...

- 교재에 있는 문장만 다 따라 읽어도 본전 3배는 얻었을 것인데...

- 근데 설명이 많은 건 싫긴 하거든.

- 뭐 인생이 원래 이런 걸 우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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