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나름 신박템, 그 찍찍이요
붙이는 그 테이프가 아닙니다. 테이프 재생기기입니다, 네.
아, 테이프가 뭐냐면… 네.
그… CD가 나오기 전에 유행하던 음원 저장 장치입니다, 네.
아, CD도 모르시면 아무튼 애플 뮤직의 석기 시대 버전 정도, 뭐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눌러서 영어 음성이 나오다가 돌아가기 버튼을 누르면 찌지지지찌지직, 픽사 애니메이션 <라따뚜이> 생쥐 형제가 급박한 탈출 상황 중에 대화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던 그 찍찍이.
영어 좀 한다는 사람이면 이 장비를 꼭 가지고 있었다. 암, 이것도 없으면 영어 공부 좀 했다고 할 수 없지, 암.
요새는 스마트폰 앱에서 영어 음성을 듣다가 조금 더 앞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화면을 왼쪽으로 한 번 쓸어주기만 하면 되지만, 이걸로는 직접 돌아가기 버튼을 눌러야 했었고 이게 나름의 소근육 운동이었다.
미국 어디에선가 왔을 명랑한 목소리의 여자가 말하는 음성을 듣다가, 뭐라고 했는지 잘 들리지 않을 때는 다시 돌아가서 들었다. 듣고 또 들었다. 하지만 뭐라고 했는지 잘 들리지 않을 때가 너무나도 많았고, 아무리 열심히 귀 기울여 들여도 들리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도대체가 영어 음성은 왜 그렇게 빠른 건지. 아이가 처음에 말을 배울 때처럼 천천히, 친절하게, 인간 대 인간으로서 배려심을 담아 또박또박 말해주지 않았던 걸까.
사실 영어 공부를 함에 있어 구간 반복은 정말 효과적이다.
안 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반복하는 건 전체를 똑같이 반복하는 것보다 100배는 효과적이다.
다만 찍찍이 구간 반복으로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버튼을 눌렀다 뗐다 하는 게 심적으로 상당한 피로감을 준다는 거였다(핑계). 생쥐가 떠드는 것 같은 그 소리도 싫었다(또 핑계). 못 알아듣는 부분이 많으니 그 미국인 여자의 밝디밝은 영어 문장 음성보다 찍찍찍 생쥐 떠드는 소리를 더 많이 듣게 되는 것도 싫었다(그냥 다 핑계).
음성 배속을 좀 느리게 해서 들으면 더 잘 들리긴 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나오는 소리가 '너의 아이를 납치해서 데리고 있으니 1시간 이내에 300억을 입금하지 않으면 영영 아이를 볼 수 없을 것이다'와 같은 친절한 안내 전화와 유사했다는 것이었다. 찍찍이로 영어 실력이 상승한 사람들의 후기는 많았지만 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 생쥐 소리의 기억 정도.
찌지지지찌지직,
이럴 거면 넌 날 뭐 하러 샀니.
찌지지지찌지직.
[삽질 복기]
- 배속 느리게 하고 납치범 영어라도 들을걸.
- 손가락 근력 운동을 한 후 다시 도전할걸.
- 핑계 그만 대고 제대로 할걸.
- 그냥 찍찍이 사지 말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