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필기체, 그림을 그립시다, 참 쉽죠?

쉽긴 뭐가 쉬워

by 이보라




아무래도 느낌이 만년필로 써야만 할 것 같다.


세 줄 안, 두 칸 자리에 맞춰 흐느적흐느적 영어 필기체로 단어를 쓴다. 아니, 그린다.


악보에 음표를 그려 넣는 느낌이다.

오선지 악보가 아니라 삼선지 악보.


멀쩡하게 생긴 알파벳 단어도 헷갈릴까 말까 했던 시절, 살아 숨 쉬는 고통을 주던 영어 단어는 필기체라는 옷을 입고 또 다른 (외계) 생명체로 살아나 혼란을 야기했다.


m과 n 필기체는 그렇다 치겠는데, r이랑 s는 도대체 어째서?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아도 r과 s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


필기체는 도대체 왜 쓴 거람?

이걸 배워서 쓸 데가 있긴 한 건가?


그런데 돌이켜 보니 이게 아주 쓸모없는 일은 아니었던 게, 일을 하다가 외국인들이 메모를 하면서 설명을 할 때 필기체로 써서 주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물론 문장을 필기체로 쓰는 것과 동시에 말로 설명을 했기 때문에, 필기체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뭐야, 그럼 영어 필기체 못 알아 봐도 괜찮다는 거잖아.


맞다. 정확하다.

참으로 똑똑한 독자가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위의 문단은 하나도 쓸모가 없지만, 나름 쓴다고 썼는데 버리기 아까워서 그냥 넣었을 뿐이다.


손 편지를 쓰는 시대였다면 영어 필기체를 배워둔 게 쓸모가 있었을까?


학교에서, 회사에서, 내가 외국인과 주고받은 건 모두 이메일이었다.


아주 명료한 Arial 글꼴. 아니면 Times New Roman, 아니면 Verdana? Calibri? Tahoma? 필기체 같은 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아니었다. 어딜 감히 겁도 없이 말이야.


교환 학생으로 싱가포르에 가서 들은 중국어 수업에서 유럽 친구들이 한자를 쓰는 광경을 보았다.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그걸 보고 있노라니 영어 필기체를 쓰겠다고 설레발을 치던 시절이 떠올랐다.


한자 쓰기가 많이 힘겨워 보였지만, 미술 수업 같은 즐거움도 있는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립시다.

이렇게 쓱쓱, 저렇게 쓱쓱.


참 쉽죠?





[삽질 복기]

- 영어 필기체는 도대체 왜 배운 걸까?

- 그 시간에 영어 단어 공부나 더 할걸.

- 그 시간에 영어 문장이나 더 읽을걸.

- 아, 그 시간에 만화책이나 더 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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