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다 풀었어?
미대를 가고 싶었다.
학교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미술부실에 있는 각진 조각상을 마주하고 앉아, 귓바퀴의 397가지 그림자를 표현해 내기 위해 연필을 사각거렸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그림을 그리면서, 미대 졸업 후 화가가 되어 그림쟁이로 잘 먹고 잘사는 허망한 꿈을 꿨다.
하지만 아무리 조르고 졸라도, 미술부 선생님이 미대 도전을 권장해도, 부모님은 반대를 했다.
미대를 가려면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미대 입시 준비를 해야 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기에 모든 게 끝났다.
일장춘몽은 달콤했으나 그 끝은 씁쓸했고, 그래서 공부를 했다.
그림은 물 건너갔고 공부로 인생을 펴보리라 다짐하고 학습지를 구독했다(부모님이 그건 반대 안 하더라?).
학습지 설명 부분엔 밑줄을 치고, 여백에 참고 내용을 적으면서 인쇄된 모든 활자를 눈과 손으로 훑었다. 문제 풀이 학습지도 모두 풀고, 오답 노트도 만들었다. 미대를 가지 못한 분노가 학습지를 한 장 한 장 불태웠고, 당연히 영어 학습지도 이 모든 과정을 거쳤다.
'대충 풀다 말고 버릴 줄 알았는데 다 풀려 있어서 놀랐다'라는 (기대치 매우 낮은) 아빠의 말도, 타올랐던 미대의 꿈도 모두 먼 과거의 일이 되었다.
이제야 돌이켜 보니, 미대는 정말 내 길이 아니었다(안 가길 천만다행).
연필로 난도질해 놓은 영어 학습지는 회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입도 트이지 않았다(이런).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런 것 같았다.
그때는 몰랐다.
그렇게 영혼을 불태워 쌓아 놓은 영어의 기초가, 향후 20년 동안 영어로 떠들고 다닐 때 수시로 연행되어 불멸의 삶을 누릴 줄이야.
그럴 줄이야.
[삽질 기록]
- 난 내 영어 다 미드 때문에 된 줄 알았지.
- 학교 공부가 기초 자산이 된 줄 몰랐지.
- 공부는 역시 다 남는구나.
- 휴, 미대는 안(못) 가서 정말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