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돌 말아 참기름 찹찹
넷플릭스, 유튜브, 테드, 틱톡 등 영어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가 도래하기 전이었던 선사 시대의 이야기를 (또) 해보고자 한다.
나의 영어 공부의 역사는 지구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현대 지구인에게 상당히 생소한 구석들이 좀 많겠지만, 어차피 내 글을 읽는 사람이 별로 없으므로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거주하고 있던 가구는 과외도, 학원도 보내주지 않는 악덕 업주가 운영하는 가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수능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EBS 강좌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았고, 그 매체는 TV였다(앗싸). 코끼리 얼굴만 한 컴퓨터가 집에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안방에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자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면야독형 수험생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것이었다.
EBS 강좌를 틀어 놓고 공부를 하다가 악덕 업주 부부가 취침을 개시하시면, 아리랑 TV 영어 프로그램으로 채널을 종종(자주) 돌리곤 했다.
그리고 그 중 기억에 남는 건 퀴즈쇼 <컨텐더스(The Contenders)>였다.
일단 남자 진행자의 얼굴이 상당히 반반하다는 점이 첫 번째 관전 포인트였고, 9년 가까이 영어 공부를 했는데도 영어가 들리지 않는다는 진기함이 두 번째 관전 포인트였다.
말이 너무 빨라서 아무것도 안 들리는 듯했지만, 아주 가끔 등에 여드름 나듯 한두 개씩 들리는 단어와 문장이 있긴 했다. 오, 감격. 영어 방송이 들리다니. 그것만으로도 자기 감탄의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퀴즈에서 아깝게 떨어지는(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이 흥미로워서 종종 즐겨 보았다.
한밤중에 악덕 업주 부부가 화장실 방문을 위해 강시처럼 방에서 튀어나오실 때는 평소 단련해 둔 민첩함으로 EBS 채널로 긴급 복귀를 했다.
<컨텐더스>를 자주 챙겨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영어에 대한 흥미를 유지할 정도로는 종종 보았다.
그것 때문에 수능을 말아먹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금 말아먹었다.
갑자기 김밥 먹고 싶네, 킁킁.
[삽질 복기]
- 역시 TV는 출연자의 얼굴이 중요하다.
- 역시 공부하는 척하는 재미는 중독적이다.
- 빠른 채널 전환도 능력이다.
- 나름 영어 듣기엔 좋았을 것이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