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나 깨나 주의
일단 진정합시다.
그 예쁘고 똑똑한 아이는 제가 아니니까 흥분하지 마시고요.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독백 모드 진입)
대학교 때 같은 학번 아이였다.
예쁘고 똑똑했다. 키도 크고, 날씬하고, 외국에서 살다 와서 영어도 유창하고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평화로운 세상에 위화감을 조성하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해리 포터> 원서 시리즈를 완독했다고 했다. 우와. 원서를 저렇게 읽는 사람이 실제로 있구나. 게다가 한 권도 아니고 여러 권을!
왠지 모르게 부럽고 멋있어서 나도 <해리 포터> 원서를 구해서 읽어 보았다.
노력은 했다. 나 진짜... 노력은 했다.
읽어 보려고 노력했으나 읽히지 않았다. 처음부터 가시밭길이었다.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데, 모르는 단어가 사방에서 튀어나오면서 얼굴을 찌르고 발을 걸어 넘어뜨린다. 나아갈 수가 없었다. 영화는 이렇지 않았는데 도대체 왜 이럴까 생각해 보니, 영화에는 자막이 있었잖아 이 여자야. 넌 지금 사전도 안 찾아보잖아 이 여자야.
문체가 가벼운 자기계발서나 자서전 같은 것도 버거운 판에 소설이라니 뭘 몰랐다. 소설을 읽으려면 어휘력이 일정 수준 이상 되어야 하는데 그걸 몰랐다.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서 읽으면 되지만 그것은 너무 수고로움이 많아 보였다. 그 많은 단어를 언제 찾고 있담. 재미없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해리포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저기요. 좋아하지도 않는 책을 도대체 원서로 왜 봐?
(영어 공부 도움 된다고 하니까 그랬겠지).
내 탓이 아니었다.
그들의 탓이었다 (그들이 누군데).
아니면 그 예쁘고 똑똑한 아이 탓이거나.
어쨌든 내 탓은 아니다. 확실하다.
그때 교훈을 제대로 얻었어야 하는데 인간은 원래 끝없이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 후에도 <반지의 제왕> 영화를 보고 소설판을 읽어보려고 하거나, <두 도시 이야기> 같은 소설을 읽어보려고 하기도 했다(왜 하필 디킨스야). 아, <안나 카레니나>도 있었지 참(원어는 러시아어잖아). 결과는 이하 생략.
하여튼 예쁘고 똑똑한 애들은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진짜 도움 안 되므로 주의를 요합니다.
[삽질 복기]
- 영어 원서는 일단 '읽히는' 책이 최고라니까.
- 말을 좀 듣자 이제.
- 좋아하지 않는 장르는 원서도 쳐다보지 말자.
- 제발 좀 그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