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미드가 있었나니
섀도잉은 역사가 길다.
손 안에 거칠게 들어오는 찍찍이가 있던 태고 때부터 있던 것인데, 아직도 영어 공부 방법 목록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 생존 능력이 만만치 않다.
미국 드라마가 한국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미드 섀도잉의 인기도 함께 시작된 것 같다.
영어 공부를 한답시고 뭐 하나 진득하게 하지 못하고 매번 새로운 방법을 기웃거리는데, 미드 섀도잉으로 영어 공부를 한다고라? 시도를 안 해볼 수가 없이 않겠느냐고요.
영어 교재를 섀도잉하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듣고 따라 하기만 하면 되는 거라며? 말하는 것처럼 똑같이 따라 하기만 되는 거라며? 쉽네. 그렇게 하면 재미도 있겠네.
일단 실행에 옮겨 본다(은근히 실행력은 뛰어나다).
미국 드라마를 틀어 놓고 말을 따라 해 본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따라 해 보는데, 이걸로 영어가 느는 거 맞나요? 귀와 입이 따라가기가 바빠서 내가 드라마 화면을 보고 있는 건지,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드라마가 구경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나의 정신이 아주 혼미했다는 점이다.
마치 나의 피아노 실력이 바이엘 하권 30쪽 수준인데, 베토벤 월광 소나타 3악장을 원 속도로 치려고 하는 시도와 같았다. 음을 몇 개 누를 수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제대로 치는 마디는 하나도 없고 당연히 연주된 음악이라는 형체도 갖추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미드 섀도잉은 한답시고 난장을 치고 있었던 당시에는 영어 회화도 제대로 할까 말까 한 상태였다. 자기소개도 버벅거리면서 하고 있는 판에, 어떻게 원어민 대화를 그대로 따라 하겠다는 말씀인지 말이에요.
게다가 미드 섀도잉의 핵심은 '원어를 그대로 따라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이다. '될 때까지 따라 말하기'를 하는 게 아니라 몇 시간 시도만 좀 해본다고 하면 효과를 경험하지도 못하게 된다.
정말 강력한 의지가 있지 않은 사람이고서야, 쉽지는 않다(수많은 책에서는 쉽다고 말하지만).
일을 하면서 상대했던 원어민이나 외국인들도 그렇게까지 말이 빠르지는 않았다. 속도도 그렇게 몰아치듯 빠르지 않았고, 말도 훨씬 또박또박 또렷했다.
솔직히 의심 가는 건 있다.
한국으로 미국 드라마 판권을 수출할 때 음원 배속을 높여서 하는 것이다.
사람이 말하는 속도가 이렇게 빠를 리가 없으므로 나의 의심은 사실로 밝혀질 확률이 높다.
두고 보라니까.
내 말이 맞다니까.
[삽질 복기]
- 그냥 그 시간에 회화책 문장이나 소리 내서 읽을걸.
- 아님 미드 섀도잉 정말 끝까지 하던가.
- 하다 말면 안 하는 것보다 아주 조금 낫다.
- 정말 아주 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