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극을 벌일 준비가 되었는가?
치열했다.
이렇게 치열한데 내가 할 수 있을까? 운동장에 100명이 서 있는데, 의자가 1개밖에 없다면 어떨까? 아마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영어권 교환 학생은 경쟁이 치열했다. 학생 전체가 달려드는데 자리는 1년에 2개가 날까 말까.
근데 나는 모든 게 애매하다. 학점도 애매하고, 토플 점수도 애매하다. 나쁘지 않은 학점이지만 쟁쟁하고 좀 재수도 없는 과 수석들과 경쟁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고, 안정권에는 진입한 토플 점수이지만 상위권 점수라고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인생에서 항상 그래왔듯 딱히 경쟁력이 없었다. 빵빵하게 채운 학점과 토플 점수를 근육 삼아 저 앞에서 달려가고 있는 아이들에 비하면 비실비실... 완주나 가능하려나.
싱가포르 교환 학생 1명. 딱 1자리. 꿈 깨야 하나?
그러나 기대를 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하나 남아있었다.
바로 면접.
면접에서 판을 바꾸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그런 게 있긴 했다면). 어떡해 뭐, 준비해야지.
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등 아이비리그 대학교 지원서 사례 자료를 인터넷에서 뒤졌다. 찾으니 자료가 생각보다 많았다.
그래, 나에게도 희망이 있는 거야! 그렇게 망상에 빠진 상태로 사례 자료를 훑어보면서 주옥같은 문장들을 뽑아내 대본을 만든다. 대부분 대단한 애들이 쓴 거라 나와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어떻게든 어울리는 걸 뽑아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누구이고, 내가 얼마나 똑똑하고 잘났으며, 나를 뽑지 않으면 양국 학교에 얼마나 크나큰 손해가 될 것인지 설득할 수 있는 문장을 만든다. 스스로 '얘는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싶지만 지금 그런 자기 객관화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입으로 달달 외워야 해. 질문받으면 술술 나올 수 있도록 말이지.
면접 당일, 자기기만에 물을 주면서 연습을 한 걸 가지고 면접관 앞에서 사기극을 벌이고 왔다. '오, 나 엄청 똑똑한가 봐?' 하마터면 나도 속을 뻔했다.
그렇게 열심히 면접에 혼을 쏟은 후, 장렬하게 떨어졌다.
역시 사기란 통하지 않는구나. 학점을 좀 더 높여 놨어야 하는구나. 그렇게 한탄하고 있을 때쯤 교환 학생 합격자가 포기를 하면서 다음 대기자에게 기회가 왔다. 그게 바로 나야, 나.
그렇게 나는 싱가포르로 교환 학생을 갔고, 대 면접관 사기극을 벌였던 경험은 나중에 인턴을 할 때도, 취업을 할 때도, 영어를 쓰며 프로젝트를 할 때도 내 곁에 길이길이 남아 살뜰하게 도움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소서.
[삽질 기록]
- 일단 밀어붙이길 잘했다.
- 면접 준비를 통한 성장도 꽤 괜찮다.
- 진작 준비하면 어디가 덧나나? 덧나지.
- 공부는 열심히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