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법 혐오자의 <그래머 인 유즈> 완독

영문법은 혐오한다, 아마도

by 이보라




영문법은 싫다.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고, 지금도 좋아하지 않고, 이 분위기를 타서 앞으로도 영원히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영문법만 싫은 게 아니고, 어떤 언어를 배우든 문법 공부는 싫었다. 문법을 공부할 때마다 혼란스러움이 솟구쳐 올라왔던 것이 바로 주요한 이유이고, 또 다른 이유는... 더 필요한가?


오랫동안 영어 공부를 했는데 왜 문법은 항상 이렇게 골치가 아픈가?


답답함에서 자라난 분노를 투영할 수 있는 대상을 본능적으로 찾다가, 책장에 처박혀 있던 대학교 교양 영어 수업 교재인 <그래머 인 유즈(Grammar in Use)>를 발견했다.


'이걸 꼭 완독하고 말겠어!' 같은 굳은 결심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니다(그런 건 원래 나에게 없다).


책장을 펼치게 한 건 그저 용광로처럼 펄펄 끓고 있는 그 분노의 기운이었다.


무엇에 홀렸는지 시험 기간도 아닌데 밑줄을 그으면서 내용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설명, 예문, 표를 읽고, 연습문제를 풀었다. 연습문제란 참 신기한 매력이 있어서, 비어 있는 밑줄을 채워가는 이상한 희열 같은 게 있었다.


이따금 두통과 메스꺼움 같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났지만, 이를 이겨내고 끝까지 읽고 풀었다. 마지막 장 연습문제에 나의 악필이 새겨져 있는 걸 보는 기쁨이란.


그리고 두둥. 초급, 중급 그래머 인 유즈를 모두 완독하고 났더니, 딱히 영어가 는 느낌은 없었다(반전).


문법은 여전히 헷갈렸고, 연습문제를 풀면서 외워뒀던 건 주사 맞기 전 피부에 바른 알코올이 날아가듯 실시간으로 날아갔다. 도대체 이 짓은 왜 한 건가 싶었지만, 나를 이끌었던 게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의 분노였기 때문에 별로 후회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법.


그리고 이후 몇 년 동안, 아주 오랫동안, 그때 풀어 놓았던 문법 연습문제들이 두고두고 영어 회화를 할 때 도움이 되었다.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던 문법의 구조는 영어로 업무를 하면서 필요할 때 의도하지 않아도 튀어나왔다.


그렇게 한 문법 공부가 나의 필요에 맞았으며, 집중해서 했기 때문에 유용했다. 의식의 영역 속에 있던 건 아니었지만 분명 나의 영어 실력의 뼈대에는 확실하게 박혀 있었다.


부족한 부분을 집중해서 해두면, 당장은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도 언젠가 쓸모가 있다는 교훈을 새삼스레 돌이켜 보며, 그 당시 메스꺼움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이겨내고 끝까지 완주했던 나 자신을 칭찬한다.





[삽질 복기]

- 그때 뭐에 홀린 걸까?

- 어쨌든 유용한 삽질이었다.

- 소리 내서 읽으면서 하면 더 좋았을걸.

- 문법 혐오자인데 언어 공부를 할수록 문법이라는 필요악과 점점 친해지고 있는 것 같아서 심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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