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모래사장이 그렇게 예쁘다던데
여느 때처럼 스윗앤사워치킨을 먹고 수박 주스를 들이켜며 탱자탱자 싱가포르 교환 학생의 삶을 즐기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여름 방학 때 인턴을 같이 했던 싱가포르인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 학부 교수님이 연구 자료 한영 번역 필요하다고 하시는데 너 할 생각 있어?"
어머 얘는, 그걸 뭘 물어봐, 새삼스럽게. 당연히 좋지.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생각지 못한 기회가 찾아올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냥 갑자기 와서 문을 두들기는 그런 기회.
푸근한 인상의 교수님이셨다.
연구 프로젝트 때문에 한국을 방문해 다수의 산업 관계자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오신 직후였고, 그 인터뷰 녹음 자료를 듣고 받아 적은 다음 영어로 번역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때만 해도 좋았다. 향후 두 달 동안 어떤 지옥을 거쳐야 했을지 몰랐으니까. 좋았겠지.
방대한 양이었다. 녹음 자료 길이만 30시간이 넘었다.
녹음 자료를 받아 적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정말 알아듣기 어려웠다. 한국어와 영어가 섞여 있었는데, 멀리서 웅얼거리는 것 같은 느낌의 한국어도 잘 안 들리고 영어는 당연히 더 안 들렸다.
30시간이 넘는 녹음 자료를 다 받아 적은 다음, 한국어 부분을 영어로 번역했다.
내가 그 자료를 마무리하며 씨름하고 있을 때, 평소에 함께 어울리던 교환 학생 친구들은 말레이시아 랑카위 해변에서 저렴한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거기 해변이 그렇게 좋다고 하던데. 물가도 그렇게 저렴하다고 하던데.
랑카위 해변에 대한 친구들의 찬양곡이 귀에 맴도는 것을 느끼며 기숙사에 남아 밤을 새워 완성했다. 부서진 내 영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총 757쪽, 글자 수 100만 자의 자료.
학생 비자 신분이기 때문에 현금 보수는 못 받고 대신 백화점 상품권을 받아서, 엄마 선물로 악어가죽 가방을, 아빠 선물로 레이밴 선글라스를 샀다.
엄마는 그 가방을 10년 넘게 닳도록 썼고, 아빠는 그 선글라스를 쓰는 걸 본 적이 없다(어디에 몰래 팔아먹은 것으로 추정).
그땐 몰랐다.
랑카위는 결국 못 가봤지만, 그 동안 고급 수업을 들었다는걸. 고강도 영어 받아쓰기 수업, 한영 번역 수업, 산업 분석 수업, 그리고 몸을 불사르듯 일하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는 수업을 들었던 거였다.
랑카위는 아쉽지만, 결국, 하나도 아쉽지 않다.
[삽질 복기]
- 랑카위 또 언젠가 갈 일이 있겠지.
- 이왕 하는 거 좀 더 즐겁게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걸.
- 영어 공부하는 셈 치고 인터뷰 문장을 소리 내서 읽었어도 좋았을걸.
- 맥주라도 마시며 할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