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본 눈과 귀를 사고 싶은데요
종종 영상 통화를 했었다.
평소에 연락을 자주 하고 지내는 가족들은 아니었지만, 원래 집을 떠나있으면 좀 더 애틋해지는 법이니까. 게다가 떠난 집이 바다 건너 있으면 없던 애틋함도 더 솟아오르나보다.
나의 첫 아이폰이었던 아이폰4가 나오기 몇 년 전이었다. 당연히 페이스타임도 없었다. 노트북에서 영상 통화를 한 거였으니까 아마도 스카이프를 이용했겠지. 당시 경증 알코올성 치매를 앓고 있던 시기라 기억은 잘 안 난다.
가족들과 시시덕거리며 영상 통화를 한참 하다가 헤어졌는데, 문득 영어로 혼잣말하는 영상을 녹화한 후에 직접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대체 뭐가 좋아).
어디에선가 그런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본인이 영어를 하는 모습을 녹화해서 다시 보면 자신의 영어 말하기 능력을 좀 더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고. 발음이나 문장 구사력 등에서 부족한 부분을 파악한 다음 이를 개선할 방안을 찾아내 영어 공부 방법에 반영하면 좋다고.
천장에서는 대형 선풍기가 돌아가면서 눅눅한 공기를 달래고, 침대 쪽 벽에는 도마뱀 한 마리가 제 집처럼 느긋하게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 조용한 기숙사 방 안에서 혼자 화면을 보고 영어로 떠들며 녹화를 시작했다.
점심으로 먹은 스윗앤사워치킨의 위대함에 대해서, 지난달 교환 학생 친구들과 갔던 캄보디아 여행의 흥미로움에 대해서, 그리고 한인 과외를 해도 채워지지 않는 통장 잔고의 적적함에 대해서 한참을 떠든 후 영상을 다시 돌려 봤다.
맙소사, 세상에.
나는 왜 저렇게 생겼고, 왜 저런 괴상한 목소리가 나는 건가?
영어 실력은 또 왜 저런담? 뭐 저렇게 틀린 게 많담?
영어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은 엄청 예쁜 사람들이구나. 말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는 사람들이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구나.
영상 속 나의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영어 실력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영어 말하기 영상 자체 평가 토론회는 긴급히 중지되었다.
한 번 해보고 다시는 그 토론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영상도 절대 다시 찍지 않았다.
그 영상을 경험하지 않는 눈을 사고 싶어서 중고 거래 앱을 훑어보았으나 그런 건 없었다.
혹시라도 파시면 연락 주세요.
[삽질 복기]
- 생각보다 말할 때 이상한 습관이 많구나.
- 시선 처리, 말투, 말 속도 점검에 좋긴 했다.
- 그렇지만 그런 건 안 해도 되었다.
- 그 시간에 영어 문장 한 줄이나 더 읽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