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것은 닭 때문이었다
전공 영어 강의를 들을 때, 비즈니스 영작문 수업을 들을 때, 교양 영문학 수업을 들을 때, 교환 학생 학교에서 교양 수업을 들을 때 항상 영작문 과제를 내야 했다.
영작문 과제는 일상 영어 회화를 하는 것과는 다른 과정이다 보니 항상 고난이 따랐다.
그러나 끝은 있었다.
드디어 나에게도 졸업이! 졸업을 하고 나면 영작문 과제와는 영원한 안녕을 고하게 되겠구나. 그렇겠구나.
그런 줄 알았다. 순진했다.
사회 초년생으로 금융 회사에 들어갔는데 보고서를 쓰란다. 산업 분석 보고서에 들어갈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엑셀로 작업하고, 차트를 그리고, 보고서를 쓰는데, 참으로 감사하게도 영어로도 쓰란다. 한글과 영어로 동시에 쓰란다. 네?
한글 보고서는 내가 데이터 작업만 하고 상사가 내용을 쓰는 경우도 많았지만, 영어 보고서는 온전히 내 책임이었다. 대학교 졸업과 함께 안녕을 고했던 영작문 과제와 그렇게 다시 눈물겨운 재회를 했다.
대학교 때는 학기 중에 몇 번만 내면 되는 거였는데, 이제는 등뼈가 구부러질 때까지 매일 보고서를 써야 했다. 매일, 정말 매일. 회사를 그만둬버리고 싶지만 치킨 사 먹을 돈을 벌어야 하므로 보고서를 써야 했다.
회사에는 영문 보고서를 검토하는 미국인 에디터도 있었다. 그 에디터가 친절하게도 내가 매일 쓴 영문 보고서에 빨간색 펜으로 난도질을 해서 가져다주곤 했다. 매일 보고서를 쓰는데 경이롭게도 빨간색 난도질은 항상 풍성함을 자랑했다. 회사를 그만둬버리고 싶지만 치킨 사 먹을 돈을 벌어야 하므로 보고서를 수정해서 다시 썼다.
그렇게 치킨 사 먹을 돈을 벌면서 영작문 수업을 받았다.
그렇게 나의 영어는 날이 갈수록 살이 쪄갔다.
그렇게 나도 날이 갈수록 살이 쪄갔다.
이 자리를 빌려 고통스러운 영작문 수업을 중도하차 없이 지속할 수 있게 항상 곁을 함께 지켜주신 치킨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삽질 복기]
- 따지고 보면 그게 다 돈 받고 하는 영어 공부였는데 말이야.
- 어차피 해야 할 일, 치킨을 떠올리며 즐겁게 할걸.
- 치킨 말고 돈까스도 사 먹어야지.
- 그리고 탕수육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