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원서 전자책의 세계에 입문하다

갱지여 가라

by 이보라



꼬질꼬질한 골판지 한쪽 면을 벗겨낸 것 같은 퀴퀴한 종이 냄새. 사포질을 해야 할 것 같은 거칠거칠한 질감. 포근한 재생지 색깔의 느낌보다는 손으로 아무리 만져도 손자국이 남는 것 같지 않은 칙칙하면서도 누리끼리한 종이 색깔.


영어 원서의 질감은 거의 항상 그랬다.


한국에서 사든, 싱가포르에서 사든 항상 그랬다.


책을 보면서 종이를 만지고 있으면 그 냄새와 질감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읽고 나면 꼭 책 표지 측면 제목 부분에 흰 주름살이 하나씩 생기면서 쭈글거리는 게 시각적으로도 상당히 불쾌한 경험이었다.


그러다가 아이패드를 사면서 영어 원서 전자책에 입문했다.


아이, 하얗고 깨끗하다.

가볍기도 가볍다.

외출을 할 때도 책을 이고 지고 갈 필요가 없고, 책을 안 가지고 나온 날도 갑자기 시간이 남을 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책을 선택할 때 실수를 범했다.


당시에 한국어로 보고 있던 책은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 평전이었고, 자연스럽게 그 책의 영문판을 첫 영어 원서 전자책으로 선택했다.


무려 656쪽이다. 영어책을 읽는 속도는 한국어책을 읽는 속도보다 3배쯤 느리니 다 읽다가 수명이 다할 수도 있었는데 그 위험성을 몰랐다. 자서전이나 평전류는 소설보다 어휘나 문체가 쉬운 편이지만 그래도 월터 아이작슨의 책은 도전이었다.


어쨌든 읽긴 읽었다.

아마도 그런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다.


하이라이트 해 둔 부분이 하나도 없는 걸 보면 읽다 만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그런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다.


돈이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괜히 영어 삽질 인생이 아니라니까.


죽기 전에 완독을 해보고자 한다.

아마도.





[삽질 복기]

- 좀 더 얇은 책을 샀다면 좋을 텐데.

- 좀 더 쉬운 책을 샀다면 좋을 텐데.

- 좀 더 저렴한 책을 샀다면 좋을 텐데.

- 다음 생에는 좀 더 현명한 사람으로 태어나면 좋을 텐데.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이전 24화통역사 직업 체험기, 경험의 소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