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컨퍼런스 콜에서 발견한 새로운 재능

역경 속 자기 발견

by 이보라



궁극의 지옥을 만났다.


회의실에 여러 사람이 몰려 앉아, 가운데 있는 비행접시 전화기에 대고 대화를 하는 시간.


전화기를 귀에 바짝 갖다 대고 하는 통화도 안 들려서 난리인데, 컨퍼런스 콜을 할 때는 회의실 책상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이 전화기로부터 30km가량 떨어져서 말을 하기 때문에 만 원짜리 무전기보다도 떨어지는 통신 성능을 체험할 수 있었다.


컨퍼런스 콜에서는 대면 회의에서처럼 표정, 몸짓, 손짓 같은 비언어적 신호가 없기 때문에, 오로지 언어적 신호에만 의존해야 했다. 콜 상대방이 내가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라면(항상 그렇다) 더욱 심장이 쪼일 수밖에 없고, 앞서 언급한 통신 성능 때문에 내가 하는 말도 최대한 또렷하고 정확해야 했다.


부족함 충만한 영어를 쓰면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 컨퍼런스 콜은 궁극의 지옥이다.


우리 팀에 영어가 되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글로벌 본사와의 업무 보고 컨퍼런스 콜은 대리 나부랭이인 나의 담당이었다. 그냥 나오는 대로 떠들어도 되지만, 중간에 버벅거리기도 하고 틀리는 것도 있으면 여러모로 모양이 빠질 것이다. 한국어 회의도 미리 준비하는데, 영어 회의를 어떻게 그냥 가서 떠든담. 준비는 해야지.


하지만 이미 프로젝트 제안서를 쓰느라 밤을 거의 새운 상태, 컨퍼런스 콜을 준비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급한 대로 보고해야 할 내용을 구어체 문장으로 휘리릭 쓴 다음 컨퍼런스 콜 회의실에 들어갔다. 말하자면 대본을 준비해 간 것이다.


회의실에 있는 다른 팀 사람들 모두가 전체 업무 일정 자료를 손에 들고 보고 있었다. 그 분위기를 타서 나도 자연스럽게 나의 대본을 업무 일정 자료에 살포시 올리고...


연기를 시작했다.


일정 자료를 보고 말하는 것처럼 대본을 실감 나게 읽었고 자연스러운 시선 처리를 위해 가끔 옆을 보거나 천장을 봤다.


오.


나는 연기자였구나.

나에게도 이런 (발)연기력이 있었다니.


나의 말귀 성능을 의심하게 만드는 컨퍼런스 콜에서 발견한 새로운 재능으로 할리우드로 진출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

만인의 평화를 위해.





[삽질 복기]

- 앞으로는 일을 그따위로 하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다음에는 손짓도 겸한 더욱 자연스러운 연기를 할 것이다.

- 할리우드에서 제의가 들어온다면 굳이 마다하지는 않을 것이다.

- 연락은 메일로 주세요. 감사합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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