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영문법 교재를 사서 공부하는 진지파의 최후

스포일러: 안타까운 최후

by 이보라



아무래도 제조한 지가 좀 오래되다 보니 고장이 잘 난다.


분명 멀쩡하게 작동이 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삐걱거리면서 이상한 소리도 내고 갑자기 제멋대로 작동한다.


그날도 그랬다.


분명 20년 넘게 힘들고 지루한 영어 공부 방법을 피하는 기능이 나름 원활하게 작동해 왔는데, 그날은 탐지기에 이상이 발생한 것인지 갑자기 고장이 났다. 그렇게 고급 영문법 교재를 사고 말았다. 그림도 많고 가독성도 좋은 입문용 문법 교재가 아니라 대학교 수업 시간에 볼 법한 두꺼운 책이었다.


하, 이거 어디 가서 또 고쳐야 하지.


감지기에 이상이 생겼던 이유는 '관사' 때문이었던 걸로 추정된다.


이미 회사에서 영어를 쓰면서 일을 하고 있었고, 드라마도 자막 없이 얼추 보고 있었고, 영어 원서도 읽고 있었지만, 어디에 a를 갖다 붙이고 어디에 the를 갖다 붙여야 하는지는 좀 헷갈릴 때가 있었다.


문법 공부보다는 자연스럽게 드라마에서, 원서에서 영어를 익힌 편이라 실전에서는 꽤 유용한 영어였지만, 좀 더 체계적인 접근을 위해(이제 와서?) 고급 영문법 교재로 제대로 탐구를 해보기로 했다.


관사 부분을 펼쳤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미궁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게 음주측정기에 숨을 내쉬면 면허 정지가 나올 것 같다. 숨을 잠시 고르기 위해 관사 부분을 벗어나 숲을 탐색하듯 책 전체를 훑어보기로 한다.


그 숲은 외계 생명체가 가득한 곳이었다.


중고등학교 영어 시간에 배웠을 게 분명한 문법인데 여러모로 생소하다. 왜 내가 옛날에 드라마와 원서 같은 걸로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혔었는지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역사적 현재 시제, 타동사적 구동사, 완료형 분사 구문, 법조 동사, 절대 복수, 재귀대명사, 어구 부정, 주어 지향 부사, 도치구문...


이 글을 읽는 이의 트라우마 방지를 위해 여기까지 쓰기로 한다.





[삽질 복기]

- 그냥 생겨 먹은 대로 할걸.

- 제대로, 끝까지 안 할 거라면 책을 사지 말걸.

- 샀으면 제대로, 끝까지 할걸.

- 정신 좀 차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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