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듣는다고?
미국 드라마를 들어 봤습니다.
네?
미국 드라마를 '들어 봤습니다'라고 쓴 거 맞습니다. 네.
그런 날이 있다.
책을 보려고 하는데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날.
오디오북을 들으려고 하는데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날. 잡념만 자꾸 떠오르고 오디오북 음성은 그렇게 귓가를 스치는 가을바람처럼 흘러만 간다. 앞으로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계속 제자리. 안 되겠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봐.
그날도 그랬다.
설거지를 하면서 오디오북을 듣는데 영 내 마음은 이탈리아에 가서 짠맛 넘치는 화덕 피자를 먹고 있다. 팟캐스트도 마찬가지. 그럼 뭐 듣지? 아무것도 안 듣기에는 귀가 좀 심심하고, 음악도 안 듣고 싶은데 말이지.
음, 설거지 하면서 미국 드라마를 봐 볼까?
휴대전화 거치대를 수전 뒤에 놓고 드라마를 켰는데, 생각지 못한 복병이 있다. 드라마 화면을 보느라 접시에 묻어 있는 돼지 앞다리 기름기 제거에 온 마음을 집중하기가 어렵다. 이러면 곤란한데...
그래서 화면을 꺼버렸다. 귀로만 미국 드라마를 본다. 아, 아니, 듣는다.
영어 인생 30년, 이제 미국 드라마를 귀로만 들어도 내용은 거의 다 알아 듣는다(사실 15년 전쯤부터 이미 얼추 가능했다. 이후 15년 동안은 실력이 별로 안 늘었다는 뜻). 모르는 단어는 여전히 있고(한국어도 좀 그렇다), 놓치는 문장도 여전히 있지만(흑, 한국어도 좀 그렇다) 내용 이해에 무리는 없으므로 드라마를 계속 들어 본다.
아니 근데 요거 요거, 나름의 재미가 있다.
배우들이 하는 말을 통해 표정과 행동과 공간을 상상할 수 있다. 얼굴은 안 보이지만 목소리를 통해 대화 중인 사람들의 관계를 추측할 수 있다. 호오, 약간 소설을 읽는 것 같아!
대사 없이 화면이 오래 지속되는 장면에서는 상황을 전혀 이해할 길이 없지만, 전후 상황을 통해 추론하는 재미도 있다. 목소리만 듣고도 그 배우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서 찾아봤는데 맞췄을 때, 그 쾌감도 무시 못 한다.
그렇게 '더 프랙티스' 1-6시즌을 통째로 '들었다'.
첫 에피소드를 조금 본 거 말고는 귀로만 들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조연 배우 얼굴은 전혀 모르지만 아주 흥미로운 관람이었다. 아, 관람이 아닌데. 아무튼.
오늘도 풍요롭다.
영어 덕분에, 그럭저럭.
[삽질 복기]
- 잡념이 많은 덕에 새로운 경험을 했다.
- 영어 공부 방법은 역시 무궁무진해.
- 오디오북과는 또 다른 세계라 좋다.
- 역시 설거지할 때 영어 공부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