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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Feb 14. 2024

인생은 기세다

버티는 존재의 저력


나는 어제 몹시 울적했다. 그 어떤 이유도 없이 그냥 평소처럼 지내고 재밌는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것을 들어도 계속 기분이 우울했다. 아마도 호르몬의 변화라던가 뭐든 원인이 있기야 했겠지만 어쨌든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익숙하게 그 상태에 휩쓸리면서, 잠긴 입 안으로 넘어오는 감정들을 꿀떡꿀떡 삼켰다. 나는 분명 이 순간이 지나가고 사라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은 또 마음이 무척 편안했다. 스스로도 어이없을 만큼 멋대로인 감정기복의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나는 적당히 팔을 흔들고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비정기적이지만 꾸준히 찾아오는 정서적 난동에 대해 나름의 대응방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전에는 불현듯 울적해지면 덜컥 심각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적절한 진단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우울증이 아닐까 걱정했다. 우울증이 아니었다거나 지금도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증상이 심했던 때도 있고 아마도 내 인생의 일부분에는 분명 병적 증세가 있던 순간이 있었겠지만 현재로서는 그게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물론 문제를 겪고 있는 경우 제대로 된 의학 처방과 치료가 필요하다.※ 지금부터 하려는 말은 지극히 개인적인 상황과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에는 내 마음에 우울과 불안이 싹틀 때면 그걸 해결하려고 했다. 무기력한 상태를 타파하고 더 나은 상태가 되기 위해서 여러 조치를 취했다. 새로운 활동을 해보기도 하고, 종이에 손으로 직접 글을 쓰면서 마음을 씻어내려고도 하고, 눈물을 참고 슬픔을 지우려고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눈물이 나면 그냥 휴지를 뽑는다. 전에는 재밌는 걸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맺히는 내가, 그렇게 눈물을 흘리다가 웃긴 장면에서는 또 웃음을 터뜨리는 내가 미친 사람 같아서 걱정이 됐는데 요새는 그냥 매 순간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도록 놔둔다. 

또, 햇볕을 쬐고,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방 안에서 내 가슴 앞으로 양팔을 겹쳐 포갠 다음 나를 두드린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고 속으로 외친다. "인생은 기세다!" 가끔은 밖으로 말할 때도 있다. 지금 내가 우울에 지쳤을지라도 내 안의 단단함을 잊지 않고 그 믿음을 기세로 밀고 나가면 결국 감쪽같은 날을 다시 맞이하게 된다.


나는 여자 축구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보는데, 그 경기들을 볼 때마다 늘 생각하는 것이 있다. 경기에는 각 팀의 전력과 선수 개인의 실력도 정말 중요하지만 막상 승패를 가르는 가장 큰 요소는 그날의 기세라는 것이다. 전력이 다소 부족한 팀도 경기하는 동안 얼마나 간절한지, 얼마나 필사적인지, 얼마나 꺾이지 않는 기세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기적 같은 승리를 만들어 내는 경우가 많다. 지난 카타르 월드컵 때, 많은 사람의 마음에 닿았던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기세다!


나는 축구나 그 어떤 운동경기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나의 삶을 살면서 많은 순간에 나를 가로막는 장애물과 겨루고 있다. 누군가에는 장애물처럼 느껴지지도 않는 간단한 일상의 한 부분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고난이 되기도 한다. 전에는 너무나도 쉽게 걸려 넘어지는 나에게 분명 질병으로 인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았다. 타고난 성향이라든가 사고방식, 기질이 많은 것을 유발하고 결정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좌절했고, 다시 일어나서 방법을 찾았다. 선천적이고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다르게 대처해야 했다. 나는 맞서 싸우고 무찌르고 극복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버티기로 했다. 맷집을 키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밀려오는 불안과 우울이 나에게 질릴 정도로, 나를 막막하게 생각할 정도로 가만히 버티고 견뎌내기로 했다.

정신없이 얻어맞는 와중에도 나는 웅크리고 눈을 빛낸다. 그래서 어떡할 건데? 아무리 이렇게 나를 끈적한 울적함에 처박고 무기력으로 짓눌러놔도 나는 가만히 버티고 있다가 너네가 지쳐서 사라지면 툭툭 털고 일어날 건데?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게 누군지, 누가 이기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참아낸다. 폭풍이 가시고 다시 찾아온 평안에 앉아 쉴 때면 나름의 승리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이번에도 내가 이겼다 싶은 마음에 뿌듯하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그 고통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가 마냥 견뎌낼 만한 것은 아니다. 분명 몹시 괴롭고, 아무리 머릿속을 치워놓아도 끊임없이 넘치는 냄비처럼 불안에 잠식되고 만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을 견뎌낸다. 정말 말 그대로 그저 참고 버텨낸다. 결국에 이기는 것은 나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승자의 기세로 밀어붙인다. 쉬운 일이 아니지만 가장 효과적이고 안전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 방법은 나의 내면이 아닌 외부적 충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모든 것은 기세다. 특히나 겁이 많은 나는 그 사실을 알고도 쓰기가 너무 어려웠는데 요즘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나는 나의 맷집과 기세를 믿는다. 살면서 마주하는 고난들이 할 만큼 하고 지나갈 때까지 버텨낼 자신이 있다. 인생은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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