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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마나 Jun 21. 2020

[글 부문] 2014년 초여름의 머윗대들깨나물

딸의 엄마, 엄마의 딸

"엄마는 언제 태어났어?”

잠들기 전 둘째 아이가 묻는다. 나는 네 살이 되어가는 아이의 솜털 이마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아주 오래 전에 태어났지."


"아주아주 먼 옛날에?"


아이는 동화책에서 한번쯤 들었을 법한 말로 반문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첫째 아이까지 함께 끌어안았다. 아이들은 이내 잠들었고 나는 여전히 깨어있었다. 아이의 물음을 곰곰이 곱씹어본다. 자기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줄곧 어른이었던 엄마에게도, 한때 ‘태어났던 순간’과 아이로 살던 시절이 있었음을 아이는 깨달은 모양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 생의 첫 순간을 상상하니 그곳에는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렸을 나의 엄마가 있다. 생각이 그곳에 미치자, 처음으로 엄마가 된 딸을 보살피던 그 때의 엄마가 떠올랐다.   “아이고, 벌써 여름이 되려는가 이젠 덥다.”

장을 보고 집에 막 돌아온 엄마가 한눈에 봐도 잔뜩 무거운 배낭을 거실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뭘 또 이렇게 샀어, 무겁게…” 내가 태어난 지 이제 갓 일주일을 넘긴 첫 아이를 품에 안고서 묻자, 엄마는 대답 대신 눈도 아직 못 맞추는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새끼, 할머니가 손 씻고 옷 좀 갈아입은 다음에 안아줄게.”


말과는 달리 엄마는 배낭에서 사온 것들을 차례로 꺼내보이며 말했다.

"내 새끼가 먹을 복이 있는지 계절을 잘 타고 났다. 시장에 너 좋아하는 나물들이 종류별로 나오기 시작했더라. 제철나물은 재래시장이 물건이 좋긴 좋아. 그래서 일부러 시장까지 갔다왔다니까. 이건 머윗대, 이건 깻순, 요건 고춧잎, 그리고 느타리버섯, 이건 완두콩이고.” 그 이후로도 콩나물에 숙주까지 사계절 먹는 나물들이 줄지어 한보따리씩 나왔다.


엄마는 산후조리원에 들어가겠다는 나를 굳이 말려세우며 친정에서 몸조리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남들보다 쉽지 않은 임신생활을 했던 탓에 엄마는 몸조리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고 했다. 엄마의 고집 덕에 나는 그해 늦봄에서 초여름까지 친정에서 지내며 엄마, 아버지와 함께 아이를 키웠다. 엄마가 오전에 장을 봐 오면 각종 나물 손질은 아버지 몫이었다. 아버지는 마당 쪽으로 난 거실 창문을 크게 열어두고 바람이 제일 잘 드는 자리에 앉아 엄마가 건넨 나물들을 하나씩 손질했다. 처음은 늘 머윗대였다. 머윗대는 그 끝을 살짝 구부려 부러뜨린 후 얇디 얇은 껍질을 벗겨내야했다. 그렇게 손질을 끝내고 나면 연초록색의 국수가락같은 투명한 껍질들이 다른 한켠에 쌓이곤 했다. 그렇게 머위가 끝나면 이파리들 차례였다. 깻순은 말 그대로 아기 들깻잎이었는데 질긴 줄기는 두고 여린 줄기까지만 잎을 톡톡 떼어내면 이번에도 다른 한켠에 보드라운 깻순이 수북히 쌓였다. 그렇게 나물 손질이 끝나면 아버지는 엄마에게 그것들을 넘겼다.


다음은 엄마 차례였다. 끓는 물 한 냄비마다 손질된 나물을 한 종류씩 넣어 머위와 깻순은 들깨가루와 짝꿍하고, 느타리버섯과 고춧잎은 참기름과 짝꿍 지어 보글보글 끓이고 조물조물 무쳐냈다. 그렇게 완성된 나물들은 온 집안에 맛있는 냄새를 입혔다.


들깨가루의 묵직하고 구수한 냄새, 감칠맛 돋우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며 새우젓에 볶은 애호박 냄새까지 그렇게 하나씩  유리 반찬그릇들에 옮겨지고 나면 엄마는 ‘아이고 우리는 부자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다 만든 나물들로 엄마는 한상을 차리고는 내게서 아이를 건네받아 늘 나를 먼저 먹이고는 했다.


아버지가 다듬어 건네어 준 나물은 한가득이었는데 엄마가 요리를 마치고 담아내는 나물은 작은 유리그릇을 겨우 채웠다. 그 때문인지 나는 접시에 놓인 나물에 뭉텅뭉텅 생각없이 젓가락질하기가 내심 미안했다. 엄마는 그런 내게 입에 안 맞느냐며 걱정스럽게 물었고, 나는 '너무 맛있는데 그렇게 힘들게 만든 게, 생각보다 양이 적어 먹기 아깝네’라고 말하면 엄마는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내게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넌 그저 맛있게 먹으면 돼. 너가 니 새끼가 제일이듯, 나는 내 새끼가 제일이다. 그러니까 아끼지 말고 푹푹 먹어. 알았지?” 손주가 태어나면 할머니 말고 이모라 부르라고 가르쳐야겠다던 엄마는 밥을 먹는 내 맞은편에 앉아 품에 안긴 갓난손주에게 ‘할머니가 노래 불러줄까?’, ‘할머니랑 살짝 바깥바람 좀 쐬볼까’, ‘내 강아지야, 할머니이~ 해 봐’라며 연신 아이에게 자신이 할머니임을 아이와 스스로에게 즐겁게 상기시키곤 했다.


엄마가 아이에게 그렇게 말을 거는 사이, 나는 언제나 들깨가루향이 참 곱고, 부드럽되 씹는 맛이 좋은 머윗대를 가장 먼저 집어 오물오물 씹었다. 뒤이어 쫄깃한 느티버섯나물을 질겅거리기도 하고, 쌉싸래하고 고소한 깻순나물과 씹는 맛이 오독오독 재미있는 콩나물을 차례로 입에 넣으면 금세 한숟갈씩 닳아 없어지는 밥이 아쉬웠다. 언젠가 문득 엄마는 나를 낳고 무슨 나물을 먹었을지 궁금해서 물은 적이 있는데 엄마는 음식이름 대신 쑥을 다듬던 외할머니를 이야기했었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머윗대를 보면 엄마 생각이 날 거라고 했고 엄마는 그런 내게 고맙다며 빙긋 웃었다. 아들만 둘을 둔 나는, 엄마가 된 딸을 둔 친정엄마가 될 수는 없겠지만 먼훗날 엄마가 된 누군가의 딸을 위해 그 계절에 난 가장 맛난 나물을 해 주고 싶다 생각해 본다. 어느 계절에 어느 음식을 보며 누군가를 떠올린다는 건 생각보다 꽤, 행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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